# 작가 : 김이환
# 분류 : 소설
# 출간 : 예담 / 2009년
# 평점 : 8.8점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9년, 소설가 이외수씨 외 드라마 PD, 영화감독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멀티문학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다. 새 책을 구하기도 어려운 십여 년 전 장편소설을 지금에서야 찾아 읽은 이유는 멍하니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나온 책 광고 때문이었다.
영상 출처 : 유튜브 『책 끝을 접다』
요즘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모바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책 뷰어 사이트가 많이 생기고 있는데, 이 영상도 그런 사이트에서 홍보하는 영상인 것 같았다. 유튜브에서 광고하는 책 홍보 영상들은 희대의 망작이라 불리는 핵노잼 영화마저도 김경식씨의 소개를 거치면 엄청난 빅재미의 영화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도저히 중간에 SKIP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책에 홀리게 만들어 광고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광고 영상에 홀려 오랜만에 읽은 장편소설이 바로 이 '절망의 구'인 것이다. 이 책은 총 423페이지 분량으로 장편소설인 만큼 책 두께는 조금 두껍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며 읽기보다는 집에서만 읽곤 했는데 어디서든 자유롭고 쉽게 읽을 수 있는 E-book 광고를 보고서도 내가 굳이 아날로그 형태인 책을 구매한 이유는 가독성의 문제에 있었다. 일단 나는 화면 안에 나열된 문자는 눈에 잘 읽히지 않기 때문에 장편을 화면으로 읽는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모바일 책보다는 아날로그 형태의 책을 더 선호하는 편인데 굳이 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책은 손으로 한장 한장 넘겨 볼 때의 설렘과 감촉이 좋기 때문에 종이책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두껍고, 시점이 주인공에 한하지 않기 때문에 속독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끝까지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책이다. 장수가 많아 평일에 조금씩 읽다가 할 일이 많아지면 며칠간 책을 읽지 못했는데,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자꾸만 앞의 내용을 잊어버리게 되고 책에 흥미를 잃게 되는 날도 반복되었다. 그래서 아에 주말에 시간을 내어 마음잡고 첫장부터 다시 읽게되니 점점 소설에 빠지게 되었는데 뒤로 갈수록 작가의 상상력에 놀랐고, 읽는 동안 혼란과 절망, 공포의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흡사 몇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본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체불명의 검은 구가 지구에 나타났을 때에는 SF영화 '컨택트(Arrival)'의 한 장면이 떠올랐고, 검은 구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막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에는 재난영화 '감기'의 한 장면이, 절망과 비명이 난무하는 그 난리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무리를 짓고 위험을 무릅쓰며 검은 구를 피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닐 때에는 좀비 드라마 '워킹데드(Walking Dead)'가, 마지막에 주인공 혼자만 남았을 때에는 '더 라스트 맨 온 어스(The last man on earth)'라는 미드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책은 도망치는 것으로 시작해 도망치는 것으로 끝나는 내용이다. 여느 소설책이 다 그렇듯 초반에는 주인공을 소개하고 사건이 발생하기 전, 충분한 사전 배경을 설명하느라 잔잔한 호수처럼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50페이지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잔잔한 호수에 돌덩이를 던진 듯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혼란과 스릴이라는 파장은 목이 뻐근해져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할 정도로 다음 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책에 대한 평을 한다면 스케일이 커진 지금의 재난영화와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작가의 상상력과 기발함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인간의 본성과 내면에 대해서는 직설적이다 못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불쾌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데 나는 바로 이게 작가가 검은 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심적인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잔인성. 타인이 존재하는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혼자가 되어서야 결국 민낯으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인간의 나약함.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주인공과 젊은 청년 단둘만 세상에 남겨졌을 때, 그는 젊은 청년에게 허세섞인 말투로 세상과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젊은 청년은 사실 탈영한 군인이었는데 성희롱과 폭력이 난무하는 '군대'의 비정상적인 부분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자 주인공은 '군대에서는 당연한 것'이라며 군대 내 가혹행위를 옹호하며 자신 또한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당하기도 했고, 후임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좋은 경험이었고, 폭력을 통해 후임들을 잘 키워냈다고 뿌듯해 한다. 또한, 사회생활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성매매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업무의 연장일 뿐이라고 말해주며 자신의 예비 신부에게 그 사실을 들켰을 때 조차 사랑 없이 한 행동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사랑하는 것은 너뿐이라며 별일 아닌 일에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자에게 남자들이 돈 벌기 얼마나 힘든지 이해하지 못한다며 남자는 열심히 살았던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듯 젊은 청년에게 떠들어 댔다.
읽는 내내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미화되지 않는 현실을 눈앞에서 본듯한 기분이었다. 작가는 주인공의 이런 모습을 통해 현재 사회의 문제점을 필터링 하지 않고 현실적이며 거침없이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모습은 주인공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마져 사라진 상황이 되서야 자신의 행동들이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왔음을 고백하게 된다. "씨발새끼들, 다 죽어도 싸." 그동안 자신이 싫어했던 청년의 말버릇처럼.
이 독특하고 스릴있는 소설의 결말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단숨에 스릴러라는 장르가 만화적 감성으로 바뀌었달까? 갑자기 이게 뭐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흡사 회가 거듭될수록 시청자를 흥미진진하게 몰아갔지만 결국 마지막회에서는 그동안 풀어놓은 떡밥조차 회수하지 못해 시청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과 같은 결말처럼 용두사미로 끝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내용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의 흡입력은 엄청나다. 10년이라는 세월에 소설책의 종이는 노랗게 빛이 바랬지만 상상력은 낡지 않았다. 2019년에 나온 소설 못지않게 세련되며 겁이 없다. 검은 구가 절망의 구가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스릴 넘치는 상황들이 궁금하다면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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