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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조선을 건국한 고려 변방 출신의 무신 태조 이성계

by 박또니 2019.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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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대 태조 [이성계 / 이단]

출생 사망 : 1335년 10월 11일 ~ 1408년 05월 24일(74세)

재위 기간 : 1392년 07월 17일 ~ 1398년 09월 05일(6년 2개월)

 


고려 변방 출신의 무신 이성계. 역성혁명에 성공하고 조선을 건국하다.

고려말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기였다. 안으로는 권문세족이 고려 조정을 농단하고, 밖으로는 몽골과 여진족,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다. 이 당시 고려 동북면의 무신 이자춘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쌍성총관부의 천호였는데 공민왕에게 투항하고 아들 이성계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워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후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은 이성계는 1362년 홍건적을 격퇴하고,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등 고려 각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얻게 된다.

 

한편, 대륙의 패권은 원나라(몽골)에서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한족)로 교체가 되었는데 명나라가 옛 쌍성총관부 지역인 철령 이북 땅이 원나라의 땅이었다며 반납하라는 통보(명의 철령위 설치)로 도발해오자 최영 장군은 1388년 4월, 제2차 요동정벌을 추진하게 된다.

 

※ 1차 요동정벌은 동녕총관부 정벌이라고도하여 원간섭기때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를 자주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공민왕이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요동에 진격하여 일시적으로 요동성을 점령했던 북벌운동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모한 싸움이라고 판단했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반대했음에도 최영 장군의 주도로 우군도통사에는 이성계 장군이, 좌군도통사에는 조민수 장군이 임명되며 어쩔 수 없이 요동으로 출정하게 된다.

 

그리고 한달 뒤. 이들은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 다다르게 되지만 지속된 장맛비에 더 이상 진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성계는 중앙에 회군을 두 차례 요청했다가 모두 묵살되자, 좌군도통사인 조민수 장군을 설득하여 자체적으로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게 된다. 참고로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명이 없이 군대를 돌린다는 것은 반역행위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개경으로 돌아가면 이성계는 역모죄로 처벌을 받게 될 운명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 장군과 함께 개경을 점령한 뒤 우왕을 축출하고 어린 창왕을 옹립해 섭정을 시작했으며, 최영 장군을 제거함으로서 군사와 정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창왕 또한 왕씨의 핏줄이 아니라는 명분(폐가입진)으로 폐위시킨 후 공양왕을 보위에 올린 이성계는 점차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신진사대부(친명파)들이 개혁의 방향성을 두고 온건개혁파(정몽주파, 고려 왕조 지속)와 급진개혁파(정도전파, 새로운 나라 개창)로 나뉘게 되면서 개혁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이때 태조의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은 '역성혁명'이라는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정몽주를 암살하므로써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겨 받게 했다. 그리하여 그해 7월 17일 이성계는 백관들의 추대를 받아 조선의 왕들 중 최고령의 나이인 58세에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통해 조선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 영상 출처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 이성계는 즉위 후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왕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왕조는 명나라에서 책봉받는 형식으로 개국되었는데 정식 국왕으로 책봉받기 전까진 명에서 내린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써야 했다. 이렇듯 대외적으로도 민생안정 측면으로도 새로운 국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성계의 새 나라는 개국 뒤에도 '고려'라는 국호를 유지해야 했으며, 태조 2년(1393년) 2월이 되어서야 명에 의해 '조선'이 국호로 선택되면서 새로운 국호 '조선'을 사용하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왼팔이었던 포은 정몽주와 오른팔 삼봉 정도전

 

정몽주와 정도전은 당대 유학자이자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인 '이색'의 문하에서 만나 조은, 남은 등과 함께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하려는 꿈을 꾸게 된다. 당시 이성계는 정몽주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친밀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의 인품과 능력에 감격하여 정도전에게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정도전은 마침 자신이 품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선 권문세족이 아닌 군사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 그 길로 바로 함흥에 있는 이성계의 막사로 찾아가 이성계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정치적인 뜻이 통하자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들이 '역성혁명'을 꿈꿨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이미 이성계에게 매료된 정도전은 이성계의 앞날을 차근차근 그려나가기 시작했고 그의 참모로서 새로운 세상을 하나씩 그려나갔다. 그러던 중 명이 철령위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친명파였던 신진사대부들은 북벌론을 주장한 최영 장군이 아닌, 외교론을 주장했던 이성계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결정적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찬성한 후 우왕을 축출하면서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와 함께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후 이들은 공양왕을 옹립해 고려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성이 점점 역모와 같은 역성혁명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도전을 원수처럼 대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이사실을 먼저 눈치챈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는 새로운 '조선' 왕조의 초대 국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몽주를 끝까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한나라의 대신이자 아끼던 사람을 함부로 죽인 이방원을 오히려 크게 책망했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까지 쓰여지게 된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태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不孝)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 태조실록 中에서 -
▲ 영상 출처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이성계가 포은 정몽주의 마음을 얼마나 돌리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오랫동안 함께 전장을 누비며 같은 개혁을 꿈꾸었기에 자신의 사람을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고려에 대한 충(忠)이 가득한 정몽주를 끝까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태조 이성계의 천도에 대한 고집. 여러 후보지 중 한양을 도읍지로 선정하다.

태조 이성계는 평소 정도전과 신하들의 의견이라면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편이었는데 천도 문제에 있어서는 강력하게 자신의 고집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개경은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려의 오래된 수도로 뼈대 깊은 개경의 중앙 귀족들은 변방의 무인 출신인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성계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즉위 한 달 만에 천도를 결심하게 된다.

 

태조는 새로운 도읍지 건설을 위해 권중화와 하륜 등 신하들에게 후보지를 찾게 했다. 이들이 내놓은 후보지는 주로 계룡산 일대와 무악, 선고개 등 다양했는데 태조는 직접 모든 후보지에 가서 살펴보고 평가하며 후대에 좋은 도읍을 남겨주기 위해서 신중을 기했고 그 결과,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주장한 한양이 최종적인 신도읍지로 선택되면서 이듬해 태조 4년(1395년) 12월에 새 궁궐인 경복궁에 입궁할 수 있었다. 참고로 한반도에 출현했던 나라의 대부분은 왕실의 출신지를 도읍으로 선정한 것에 반해, 조선의 도읍지는 왕실과 무관한 지역을 수도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한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한강을 중심으로 육지와 바다가 연결되어 교통과 조운이 편리하며, 이로 인해 효율적인 조세를 수금할 수 있다는 이점에서 선정된 것이라고 한다.

 

※ 경복궁 남쪽 출입문인 광화문 양옆에는 정의의 신이자 재앙을 막는 수호신으로 불리는 '해치상'이 존재하고 있다. 야사에 따르면 경복궁 출입구의 방향을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말하길 남쪽의 관악산은 화(火)기운이 많아 출입구가 남쪽에 있으면 화마를 입을 수 있으니 출입구를 동향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이를 무시하고 남향으로 건설해버렸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말을 흘려 들을 수 없었던 탓에 예방차원으로 광화문 양옆에는 수(水)기운이 강한 수호신인 해치상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복궁은 조선왕조 내내 크고 작은 화마에 시달려야 했다.

 


삼봉 정도전! 재상의 나라 조선의 밑그림을 그리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은 국가의 여러 요직을 겸하는 핵심 실세로 행정과 군사, 외교와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제도와 정책을 직접 정비해 나간 인물이다.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되기전부터 이미 고려 공양왕 3년에 토지개혁인 '과전법'을 반포하여 경제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고, 조선 건국 후에는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세웠다. 그밖에도 조선의 초기 법전에 해당하는 《조선경국전》을 저술했으며, 경제 정치 철학서인 《경제문감》과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를 편찬하는 등 누구보다 조선 살림에 앞장서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 나갔다.

 

또한, 한양 천도가 정해진 뒤에는 한양의 전반적인 도시 설계를 계획하며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단, 궁궐의 터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태조가 새 궁궐들의 이름을 짓게 하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지으며 그 안에 강녕전과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융문루, 근정문 등의 건물 이름을 지어 올렸고, 인의예지신에 따라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한양의 사대문 이름까지도 모두 지어 올렸다. 이처럼 조선은 정도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 정도전하면 민본사상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이유는 9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직접 목격한 백성들의 힘겨운 삶을 경험한 이유도 있겠으나, 자신 스스로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서얼 출신인 정도전은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데 고려의 제도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국가 체제를 만들기 위해 사실상 음서제를 폐지하고 오직 과거를 통해서만 관리를 배출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했다.  

 

▲ 영상 출처 : KBS역사저널 그날

정도전이 구성한 한양의 도성들이 건축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확인해 볼 수 있는 영상이다. 태조는 한양에 터를 잡을 때 궁궐 이외 종묘와 사직, 시장과 도로의 터를 잡는 것도 모두 정도전에게 일임했다. 이후 현재 경복궁 자리에 터를 남향으로 맞추고, 남향을 기준으로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조상의 위패를 모셔두던 왕실 사당), 오른쪽에는 사직단(땅의 신과 곡식의 신께 제사를 지내는 곳)을 세우니 이것을 좌묘우사라고 부른다.

 


태조 이성계와 조선의 불교

조선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숭유억불 정책이 실시되며 불교를 배척하고 불교가 부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불교였다. 태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선정할 때도 정도전과 함께 가장 많은 의견을 구했던 사람은 사가에서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무학대사 자초였는데,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니 자초를 왕사로 삼으며 그를 곁에 두고자 했다. 또한 태조는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연복사나 경천사, 회암사에 가서 법회를 구경하거나 부처에게 분향하기도 했으며, 왕실의 기일이나 탄신일 또는 지인들이 병환에 걸렸을 때에는 수백명의 중들을 궁으로 불러 모아 밥을 먹이고 금강경》을 읽게 한뒤 부처에게 기도하게 했다.

 

참고로 현재 합천 해인사에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기 위해 제작한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대장경판은 원래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에 왜적의 침입이 심각해지자 태조 7년(1398년)에 군사 2천 명을 동원하여 대장경 목판을 한양의 지천사로 운반하게 했으며, 이곳 또한 불안해지자 다음 해인 1399년 1월에 합천 해인사에 최종적으로 안치시켜 보호하게 했다. 이처럼 태조는 불교에 많은 정성을 쏟았는데 불교를 배척하던 신하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태조에게 직접 따졌을 정도로 태조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고 한다.

 

첨서중추원사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간할 발원문을 짓게 하니 "전하께서 어찌 불사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라고 아뢰자 태조가 "이색은 유학의 종사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만약 믿을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색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라고 따졌고, 정총은 이에 "이색은 세상에서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었는데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태조가 "그렇다면 이색이 도리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 태조 1년 윤12월 4일  -

그런데 이 《대장경》에 대한 일본의 집착이 태조 때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왜구는 한반도에 침입하여 노략질과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가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다 태조 3년(1394년) 일본 구주 절도사가 왜구에게 잡혀갔던 659명의 조선인을 돌려보내주고 원숭이를 바치니, 태조가 이를 고마워하여 협력을 요청하는 글과 함께 대장경 인쇄본 2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대장경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은 5개월 뒤부터 대장경판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대장경을 얻기 위해 스스로 섬을 수색하며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고 다량의 토산물들을 지속해서 조공하는 등 태조 이후 160년 이상 《대장경》판을 구하기 위한 끈질긴 집착과 욕심이 시작되었다. 이는 여전히 불교가 중요시 되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요구하면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조선은 사대부들에 의해 숭유억불을 국가 정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의 왕들은 명목상으로는 불교를 탄압했으나, 정작 조선의 왕실은 대체적으로 불교에 우호적인 편이었다. 불교신자인 태조는 물론이고 사찰을 철폐하고 불교를 억압하는데 힘을 썼던 태종 조차 태조나 원경왕후가 병에 걸리니 승려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기도를 하게 하고, 사찰에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외 세종은 경복궁 내 불당을 지었으며, 세조는 더 나아가 독실한 불교신자로 현재 탑공공원이라 불리는 곳에 원각사를 중건하고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세웠을 정도로 불교를 밀어주며 조선의 불교 부흥에 힘 쓰기도 했다. 이처럼 태조에겐 승려 자초가, 세종과 문종에겐 승려 신미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는 승려 보우가 함께하면서 조선의 불교는 사대부에게 탄압을 받는 동시에 부흥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공존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승병들의 활약으로 불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논산 쌍계사, 안성 석남사 등 새로운 사찰이 대거 중건되기도 했다.

 

▲ 조선 왕실의 원찰 '흥천사'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신덕왕후 정릉 동쪽에 흥천사를 화려하게 지어 왕후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정릉은 본래 도성 밖에 조성해야 하는 것이 국법이었으나 태조는 신덕왕후를 잊지 못하여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도성 내 정릉을 조성했는데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 정릉을 허물어버리고 도성 밖으로 이장해버렸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왕세자와 정도전이 숙청되다.

태조는 계비이자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의 임명을 두고 대신들은 나이와 공로로서 세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으나, 신덕왕후는 태조에게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워줄 것을 요구했고 태조가 이 뜻을 존중하여 공신들과 상의하니 최종적으로 11살의 막내아들 이방석이 왕세자로 결정되었다. 이 같은 결정은 태조가 왕이 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정해진 것으로 조선을 재상 중심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정도전과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했던 신덕왕후, 태조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참고로 조선의 첫번째 왕비인 신덕왕후는 단순히 집안일만 도맡아한 인물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을 배경으로 두터운 인맥을 자랑했던 그녀는 고려말엔 자신의 첫번째 아들 이방번을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만들었고, 이방원과 사이가 좋았을 때에는 서로 합심하여 이성계가 왕이 되는데 일조한 정치적으로 야망이 큰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되는데 아무런 공이 없는 이방석이 세자가 되니 이미 장성한 신의왕후 한씨(절비)의 아들들은 납득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요동정벌을 꿈꾸며 왕자들을 압박하고 있으니, 신덕왕후 강씨(현비)가 죽자 태조 7년(1398년) 이방원 일파는 세자 이방석은 물론 이방번과 정도전 일파를 숙청하고 태조의 현존하는 적장자인 이방과를 왕세자로 세우게 된다. 이에 태조는 몹시 상심하여 한달 뒤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이방원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어 중풍과 화병에 시달리다 태종 8년(1408년) 74세의 나이로 죽게된다.

 

※ 1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난으로 무인년(1398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인정사'라고도 불리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도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 영상 출처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드라마 육룡의 나르샤에서는 이방원의 칼에 의해 경복궁 안에서 이방석이 살해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이방석은 폐세자가 되어 경복궁에서 나가 유배를 가는 길에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암살당했을 시 이방석의 나이는 17살이었는데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을 좀 더 잔인한 인물로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항상 이방석을 본래 나이보다 더 어린배우가 연기하게 하고 있다.

 

한때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고려 제일의 무신 이성계의 말로는 쓸쓸함 그 자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방과와 이방원이 태상왕이 된 이성계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고는 하나, 사랑하는 부인이 죽고 바로 어린 자식들까지 형제의 손에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아비의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었을까? 그래서인지 이성계는 태상왕이 된 후 자주 궁을 떠나 불경을 구하며 금강산이나 보개산, 소요산, 동북면 등에 머무는 날들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태종은 자주 신하들을 보내 환궁을 요청하는 일도 많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백성들의 입을 통해 살이 붙고 야사로 기록되어 오늘날 '함흥차사'의 유래로 전해지게 되었다.

 

※ 함흥차사란?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으나 보낸 차사를 모두 죽이거나 잡아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야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말은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았을 때를 비유하는 말이다.

 


※ 참고 : 태조실록(총 15권)에 적힌 주요 사건 사고

1392年 

태조 1년 7월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태조 1년 8월 강씨를 왕비로 정하고 현비라고 부름. 여러 왕자를 군으로 부름. 도당에 한양 천도를 명함. 서자 이방석을 왕세자로 정하다.

태조 1년 9월 환관의 제어, 불교 배척, 여자의 외출 제한 등 12조목의 상서문 (* 도첩제 실시 : 백성이 출가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려는 자에게 일정한 대가를 받고 허가장을 내주던 제도)

태조 1년 10월 조준, 정도전 등에게 《고려사》를 수찬케 함.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헐고 그자리에 새 종묘를 짓도록 하다.

태조 1년 11월 매일 경연을 열자고 사간원에서 상소하니 윤허하다.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과 '화령'으로써 국호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1393年 

태조 2년 1월 처음으로 명나라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다.

태조 2년 2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함.

태조 2년 6월 내시 이만을 죽이고 세자의 현빈 유씨를 내치다.

태조 2년 9월 삼군 총제부를 의흥 삼군부로 개정하고 중방을 폐지하다.

태조 2년 11월 정도전이 군사를 집합시켜 《진도》 대로 훈련시키다.

태조 2년 12월 진안군 이방우의 졸기(40세).

 

1394年 

태조 3년 4월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보내다.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고려 왕조에서 왕씨를 하사받은 사람에게는 모두 본성을 따르게 하고, 무릇 왕씨의 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 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삼척에 유배된 공양왕과 두 아들을 교살시키다.

태조 3년 5월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여 바치다.

태조 3년 6월 판삼사사 정도전이 부병 시위 제도에 대해 저술함. 정안군이 명나라에 입조하겠다 하니 남재가 따라가기를 자청하다. 국호 및 왕의 호칭 문제에 대한 표문을 정안군과 지중추원사 조반이 명나라에 가지고 가다.

태조 3년 8월 도평의사사에서 한양으로 도읍 정할 것을 아뢰니 가납하다.

태조 3년 9월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종묘·사직·궁궐·시장 등의 터를 정하게 하다.

10월 한양으로 서울(* 한나라의 중심이 되는 곳)을 옮기다.

 

1395年 

태조 4년 1월 정도전과 정총이 《고려사》를 편찬하여 바치다.

태조 4년 4월 대사헌 박경 등이 경기 토지 만으로 공신에게 줄 것을 상언(* 경기 지역에 한한 과전법)하니 윤허하다.

태조 4년 6월 판삼사사 정도전이 《경제문감》을 저술함.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다. 임금이 당나라 태종의 고사를 본받아 즉위 이래의 사초를 보려고 하니 대신이 상언하여 옳지 못하다 하고 대간에서도 또한 상서하여 옳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이에 따랐다.

태조 4년 7월 명나라 제도에 따라 제복의 등급을 정하다.

태조 4년 9월 대묘(종묘)와 새 궁궐(경복궁)이 준공되다.

태조 4년 윤9월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다.

태조 4년 10월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연침을 강녕전, 동쪽에 있는 소침을 연생전, 서쪽에 있는 소침을 경성전, 연침의 남쪽을 사정전, 그 남쪽을 근정전, 동루를 융문루, 서루를 융무루라 하고, 전문을 근정문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을 정문이라 정함.)

태조 4년 12월 노비 변정 도감을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다. 새 궁궐 경복궁에 들어가다.

 

1396年

태조 5년 1월 임금이 화공에게 분부하여 부처를 그려서 새 궁궐에 안치하고 불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태조 5년 2월 신년 하례하는 표·전문에 희롱하는 문귀가 있다 하여 힐책하는 명나라 예부의 자문.

태조 5년 8월 밤에 현비가 이득분의 집에서 훙하다.

태조 5년 9월 봉상시에서 현비의 존호를 신덕 왕후로, 능호를 정릉으로 헌의하다. 도성의 문이 완성됨.(정북은 숙청문, 동북은 홍화문이니 속칭 동소문이라 하고, 정동은 흥인문이니 속칭 동대문이라 하고, 동남은 광희문이니 속칭 수구문이라 하고, 정남은 숭례문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은 소덕문이니, 속칭 서소문이라 하고, 정서는 돈의문이며, 서북은 창의문이라 정함.)

 

1397年

태조 6년 3월 조준 정도전 등이 내관(궁녀)의 작호와 품계를 세움.(현의, 숙의, 찬덕, 순성, 상궁, 상관, 가령, 사급, 사식)

태조 6년 8월 제생원 설치.
태조 6년 12월 무진년 이후에 시행된 규정을 모아 《경제육전》을 간행하다.

 

1398年

태조 7년 1월 도평의사사에서 호패법의 시행을 청했으나 행해지지 않다. 손흥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빈 유씨를 정경 옹주로, 김씨를 화의 옹주로 삼다

태조 7년 2월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정도전이 주·부·군·현의 명칭을 정함.

태조 7년 3월 남은이 절제사를 혁파할 것을 진언하다. 문익점의 졸기(목화씨를 우리 나라에 처음 들여와 재배하게 된 내력).

태조 7년 5월 《대장경》 목판을 지천사로 운반하는데 군사 2천 명을 동원하다.

태조 7년 윤5월 물시계 경루를 종루에 설치하다.

태조 7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숙청되다.
태조 7년 9월 왕위를 왕세자 이방과에게 선양하고자 하여 이첨이 교서를 지어 바치다. 세자에게 친히 양위하는 교서를 내리다. 덕빈을 덕비로 책봉하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토로한 정탁과 박포를 귀양보내다.

태조 7년 11월 대사헌 조박의 족매이며 잠저에 있을 때의 첩이었던 유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그 아들 불노를 원자로 삼다. 임금(정종)의 생모인 절비 한씨를 신의 왕후로 추존하고 인소전에 봉안하다.

 


태조 이성계의 선대 가계도

※ 집주 이인은 이의방의 동생으로 이의방은 고려 의종 때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킨 인물이다.

조선 왕실 태조 가계도

ㆍ태조의 정비 : 신의왕후 한씨(절비), 신덕왕후 강씨(현비)

 - 신의왕후는 정종 때 추존되었고, 신덕왕후는 태종 때 후궁으로 강등되었다가 현종 때 왕후로 복권되었다.

 - 고려시대는 국왕을 제외하고 1부 1처가 원칙이었으나, 고려 말기 지배층의 문란으로 지방 출신들이 고향에 부인(향처)을 두면서도 수도인 개경에 부인(경처)을 두는 폐단이 등장했다. 이것은 첩과는 다른 개념으로 정실부인 두명을 갖는 것과 같았다. 태조가 신의왕후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신덕왕후는 당시 개경의 권문세족 가문이었기 때문에 태조는 든든한 세력 확장을 위해 정략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20살이나 어린 아내를 새로 얻게 되니 얼마나 좋았던 것일까? 태조는 죽는 날까지 신덕왕후를 끔찍이도 아꼈다고 한다.

 

ㆍ태조의 후궁 : 성비 원씨(성빈 원씨), 정경옹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찬덕 주씨 외 궁인 김씨와 기생

 - 성비 원씨(성빈 원씨) : 신덕왕후 사망 후 정식 간택된 후궁으로 사실상 태조의 세번째 정비와 다름이 없었다. 성비는 태조와 50살 이상 차이가 나는 15살의 어린 후궁이었는데 태조가 태상왕이 된 후에는 내명부 최고의 품계인 '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조선 초기에는 내명부의 품계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후에 성비를 후궁과 같은 등급인 빈으로 격하시켰다.

 - 정경옹주 유씨 : 신덕왕후 사망 후 정식 후궁에 책봉되었다.

 - 화의옹주 김씨 : 관기명이 칠점선인 김해 관기 출신의 후궁으로 숙신옹주를 낳았다.

 - 찬덕 주씨 : 의령옹주를 낳았다.

 

※ 조선 초기에는 왕실 체제가 정비되지 않아 공주와 옹주, 궁주의 사용이 혼용되었다. 

 


※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글의 대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나, 약간의 야사가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 사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바로가기

※ 태조 관련 영화 및 드라마 : KBS 용의 눈물, SBS 육룡이 나르샤, KBS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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