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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왕권강화로 조선의 통치 기반을 마련한 태종 이방원

by 박또니 2019.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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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대 태종 [이방원]

출생 사망 : 1367년 5월 16일 ~ 1422년 5월 10일(56세)

재위 기간 : 1400년 11월 13일 ~ 1418년 8월 10일(17년 10개월)

 


조선의 역대 왕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태종 이방원. 문무(文武) 모두를 갖추다.

태종 이방원은 역대 조선의 왕들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경험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내려받던 변방의 무인 출신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태조가 중앙에 진출했어도 학식으로 무시받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이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우왕 9년(1383년)에는 문과 병과에 7등으로 급제하니 태조와 그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집안에 커다란 경사였을 정도다. 그도 그럴것이 이방원의 문과 합격은 이성계 집안의 격을 올려주는 동시에 당시 고려의 중앙귀족인 여흥부원군 민씨 집안과의 혼사가 이루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원은 민씨 집안과의 혼사를 통해 정치적 동반자인 원경왕후를 곁에 두게 되었고, 원경왕후의 아버지인 '민제'의 밑에서 공부하며 민씨의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 1382년 태종 이방원이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자 당시 두 살 많던 18세의 원경왕후 민씨와 정략혼인했다.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  VS  포은 정몽주 단심가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중앙의 권력을 잡게 되면서 이성계와 함께 종일품 최고 벼슬인 수문하시중이 된다. 이미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세력 또한 탄탄하게 만들어 놓은 정몽주는 공양왕을 보필하여 고려 왕조 안에서 개혁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성계와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에는 고려 왕조에 위협이 되는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기회만을 노리게 된다. 그러던 1392년, 이성계가 낙마 사고를 당하게 되자 정몽주는 문병을 핑계 삼아 이성계의 동태을 파악하기 위해 이방원의 집에 방문했다. 이때 이방원이 그를 대접하며 서로의 마음을 떠보는 시조를 주고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 '단심가(丹心歌)'이다.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

 

시조를 통해 정몽주는 자신은 죽어서도 결코 고려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마음을 이방원에게 내보이자 이방원은 자신의 심복인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암살해버린다. 이일로 이방원은 태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몽주가 제거되고 세달 뒤에 조선이 개국하게 되었으니, 분명한 것은 태종 이방원의 정몽주 숙청은 조선이 건국되는데 큰 일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 영상 출처 : SBS 육룡이 나르샤

이방원과 정몽주가 하여가와 단심가를 나누는 장면이다. 여담으로 이방원역의 유아인과 정몽주역의 김의성은 실제 인물과 싱크로율이 높다고 생각될 정도로 캐스팅이 잘된 것 같다. 태조실록을 보면 명나라에 먼길을 떠나는 이방원을 보고 태조가 말하길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 통해 이방원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체격이 크지 못하지만 유아인 배우처럼 강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고, 정몽주의 김의성 배우는 실제 초상화의 모습과 풍채가 매우 흡사해 보이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태종 이방원.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2차 왕자의 난을 제압하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이 건국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실세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태조는 이방원을 자식이라는 이유로 개국공신에서 제외시켰고,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어린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크게 불만을 품게 된다. 그럼에도 태조는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이방원을 이용했는데 특히 명나라가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 온갖 트집을 부리며 왕자를 사신으로 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왕자들 중 제일 총명한 이방원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 외교문제를 풀게 했다.

 

그러다 태조 7년(1398년) 정도전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요동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니 이방원은 불만을 품은 왕자들과 무장들을 모아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반역 도모라는 명분으로 숙청하고 이들과 엮여 있는 이복형제 이방번과 이방석을 모두 살해했다. 이것을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이방원은 난을 성사시키기 위해 동복 형제인 이방의와 이방간을 포섭했으며 이숙번, 이지란, 조준, 박포 등의 개국공신들과 원경왕후의 처남 민무구, 민무질 등과 결탁하여 둘째 형 이방과를 왕세자로 추대하고, 최종적으로 이방과를 조선의 두번째 왕으로 만들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된다. 이후 정종 2년(1400년)에는 태조의 네번째 아들인 이방간이 박포의 이간질에 넘어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난을 제압하고, 그해 정종에게서 왕위를 선위 받아 34세에 조선의 3번째 왕이 되었다.

 

※ 태종 이방원과 이방의, 이방간 형제는 태조 때 개국공신에서 제외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개국공신에 추가되었다. 정종 이방과는 당시 소격서에서 태조 이성계의 건강을 기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의 난'에 참여하지 않았다.

 

▲ 이미지 출처 : SBS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역의 유아인 배우와 원경왕후 민씨역의 공승연 배우가 태종의 즉위식을 거행하고 있는 장면이다. 조선 초기에 왕비는 명나라에서 도입된 적의나 대삼(태종 3년에 도입)을 입었으며, 머리에도 명의 사신이 가져온 '칠적관'을 쓰게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칠적관이 소실되자 선조 이후에는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대수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사이에 일어난 잠깐의 기싸움 '조사의의 난'

태조는 부인과 아들을 잃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게 되자 자주 궁밖으로 나가 지내는 날들이 많았다. 그러다 태종 2년(1402년) 태조가 조상의 능에 참배하기 위해 동북면으로 떠나자 뭔가 의심적은 태종은 신하를 보내 태조의 행보를 살피도록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북면은 태조의 근거지로 여전히 태조를 따르는 무장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종의 걱정이 현실이 되기라도 한듯 태조가 동북면으로 향한 며칠 뒤, 동북면에서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이 반란의 주모자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 '조사의'로 신덕왕후의 복수를 하고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조사의는 동북면에 연고가 없는 사람인데 태조가 동북면으로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동북면에서 반란이 발생하니 태종으로서는 혹시 이 반란이 태조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태종은 무학대사를 태조에게 보내 환궁을 요청하는 반면, 박순이나 송유 등은 동북면으로 보내 군사의 동태를 파악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태종은 대규모의 진압군을 편성하여 동북면으로 보내버린다. 이때 반란군에게 잡힌 김천우라는 자가 이들에게 "군사 4만여 명이 동북면으로 오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를 당하려는가?"라고 말하자 두려움을 느낀 반란군에서는 도망병이 속출하더니 하루만에 스스로 궤멸하며 '조사의 난'은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후 태조는 무슨 일인지 조용히 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조용히 궁안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의 이야기가 백성들의 입을 통해 살이 붙으며 야사로 전해지게 되었는데 '함흥차사의 유래'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태조가 환도하는 길에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이야기 또한 이 사건이 모티브가 되어 야사로 전해지게 되었다.

 

 


한양으로 재천도! 강력한 왕권강화로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하다.

태조와 정종은 그동안 명나라로부터 실질적인 조선의 국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대륙은 황위 싸움으로 혼란스러웠는데 그러다보니 조선에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영락제(주체)가 명나라의 새로운 황제가 되면서 내전이 종료되었고, 태종 이방원이 명을 공격하려고 했던 정도전을 제거해주니 태종 때 와서야 조선과 명의 정국이 안정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태종을 정식적인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하여 고명과 인장을 내려주었고, 이후 본격적으로 명과의 사대외교가 시작 되었다. 안팎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태종은 우선 한양에 새궁궐인 '창덕궁'을 지어 태종 5년(1405년)에 한양으로 천도 후 조선의 통치 체제를 여럿 정비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태종은 고려 말 관리직을 수행했기 때문에 조선의 왕들 중 누구보다 관리들의 행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신하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행정 조직들을 개편하기 시작했으며, 사병을 혁파하여 군사 제도를 정비했고, 공신들과 외척들을 숙청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과 함께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면서 민심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참고로 태종 하면 냉혹한 숙청 군주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왕권에 위협이 되는 권신들에게는 자비가 없을지라도 힘없는 백성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던 임금이 태종이었다. 태종은 민생안정을 위해 실질적인 효과를 보지는 못했더라도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한 '신문고'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지방에서 중앙으로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이 침몰하자 재물피해보다도 인명 피해를 먼저 안타까워하여 재발 방지책으로 조세 운반은 수로보다 육로를 이용을 권장하기도 했다. 또한, 궁에서 길을 잃고 태종의 침전까지 들어갔던 시골 선비와 창덕궁을 구경하던 손귀생이라는 시골사람을 신하들이 발견하여 매질을 당하기 전에 궁에서 내보내는 등 백성들의 실수에는 너그러웠던 임금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업적

 

이외 태종의 업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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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재천도, 창덕궁 건설, 경복궁에 경회루 건설, 도평의사사 폐지 후 의정부 설치, 사간원 독립(신하 견제), 6조 직계제 단행, 사병 혁파(노비 변정), 각 도에 관찰사 파견, 한반도를 8개의 도로 분할, 양전 사업(토지 측량 제도), 호구법과 호패법 실시, 호포 폐지, 사섬서를 설치(종이 화폐 발행), 유학 장려, 신문고 설치, 서얼차대법(서자에 대한 관직 제한) 실시, 명나라와 외교 정상화, 함경도에 무역소 설치(여진 회유 정책), 한양에 태평관 설치(중국 사신 숙소),공도정책 시행(섬에 피난가 있는 고려인들을 조선의 육지로 불러 섬을 비우는 작업), 청계천 공사, 거북선 제작, 본격적 불교 탄압(사찰이 소유하고 있던 사원전 혁파, 사찰의 노비 국가에 환속, 불교 종파를 12개에서 7개의 종파로 조정, 242개의 사찰만 남기고 모두 폐쇄, 승려의 도성 출입 제한, 도첩제 강화, 각종 부역에 승려 동원 등), 주자소 설치(계미자 활판을 제작하여 역사서 동국사략과 태조실록 편찬), 1빈 2잉의 후궁 제도 법제화 등

 


여색을 밝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잦은 불화. 그리고 시작된 외척 숙청.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이방원에게 정치적 도움은 물론 자신의 동생들을 남편의 심복으로 만들어 태종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조력자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원경왕후의 성격을 추측해볼 수 있는 구절들이 있는데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몰래 무기를 준비하고 이방원을 부추겨 난을 준비했을 정도로 담대한 성격을 확인할 수가 있으며,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을 때에는 이방원이 죽은 줄 알고 홀로 전쟁터로 가서 싸우다 죽으려 하는 등 강인한 면모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처럼 원경왕후는 일반적인 조선의 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주체적이고 강한 여장부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태종이 왕자 시절 다른 사람도 아닌 원경왕후의 몸종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갖게 되니 태종에 대한 원경왕후의 배신감은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갈수록 원경왕후의 심기는 불편해져만 갔는데 원경왕후의 심리 변화는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의 차이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가 있다. 정종실록에는 원경왕후를 '일찍부터 부드럽고 아름다운 예의를 보이며, 항상 고요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졌었다.'라며 기록한 것에 반해, 태종실록에는 '정비는 천성이 투기가 심해 사랑이 아래로 이르지 못하여, 임금이 빈첩을 갖추고자 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면 태종의 지속적인 여성편력이 결국 원경왕후를 질투의 여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왕이 후궁을 거느리는 건 왕가의 자손을 생산하고, 후궁들로 하여금 왕비의 권세를 견제함은 물론 신하들의 세력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도 있다. 한가지 예로 조선의 19대 왕 숙종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숙원 최씨를 이용해 환국 정치를 진행함으로써 신하들의 권력을 견제하여 태종 이후 최고의 왕권을 가진 왕이 되었다. 그런데 태종에게는 이미 정비에게서 낳은 아들이 4명이나 있고 감히 태종 이방원에게 대적할 수 있는 신하들은 존재할 수가 없으니 정치적으로 그 많은 후궁들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16명으로 추산되는 후궁 외에도 동침한 궁인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은 외척 세력의 견제라는 명목 외에도 태종의 대단한 여색이 한 몫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원경왕후는 사저에서 태종과 동등한 입장에서 혼인을 맺었고, 당시 유교가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원경왕후가 갖게 된 배신감과 질투심은 그리 과하다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태종 2년(1402년)에는 뒤로 물러나 조용히 살고 있던 정종마저도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젊었을 적의 정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라며 태종에게 한마디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처럼 원경왕후와 태종 이방원의 불화는 여자 문제로 시작되었다. 원경왕후가 태종이 가까이한 궁인을 벌하면 태종은 중전의 시녀들과 환관을 내쫓아 중궁전에 유폐하다시피 만들었고, 원경왕후의 잔소리가 심해지면 자신의 거처를 멀리 옮겨버리고 중전의 폐비를 논하는 등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이들의 부부싸움은 조선왕가 중에서도 유난스러웠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은 화해하기 위해 왕비의 사저에서 잔치를 벌이는 등의 노력을 하기도 했으나, 원경왕후의 속앓이는 이제부터가 시작되었다. 태종의 세자 양녕대군은 외가에서 자라 외삼촌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태종은 훗날 양녕대군이 왕이 된다면 외척이 세자의 권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농단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종은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로 인해서 외척이라면 치를 떨게 되었는데, 왕비의 남동생들이 어린 양녕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충녕과 효령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태종으로서는 도저히 이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종은 13살의 어린 양녕에게 선위를 한다는 소동을 일으키고는 신하들로 하여금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선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불충의 죄를 만들어내어 이들을 공신 자격에서 박탈시키는 것은 물론 유배 후 태종 10년(1410년)에 이들을 유배지에서 자결시켰고, 태종 16년(1416년)에는 원경왕후가 십여 년 전 효빈 김씨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빌미 삼아 중전을 폐위시키는 대신 민무회, 민무휼 형제까지 자결시켜 중전의 가문을 멸문시켜 버렸다. 이후 원경왕후는 현대로치면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태종도 자신의 처남들이 죽음을 당할 만큼 죄가 있지 않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중전의 외가에게 가혹했던 것은 앞으로 왕이 될 세자가 외척으로부터 휘둘리지 않도록 후환을 미리 제거한 것이었다.

 

▲ 이미지 출처 : SBS 육룡이 나르샤

태종과 원경왕후. 이들의 관계는 그야말로 진정한 애증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한다. 서로 박터지게 싸우면서도 원경왕후 나이 41세에 막내아들 성녕대군을 낳아 애지중지 키웠고, 서로 싫어서 떨어져 지내다가도 원경왕후가 병에 걸리니 점쟁이의 말을 듣고 태종과 원경왕후 모두 거처를 본궁으로 옮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태종과 엇나가는 양녕대군. 결국 폐세자가 되다. 

이복동생을 죽이고 함께 대업을 이뤘던 공신마저 대거 숙청해버린 잔혹한 군주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자식들에게만은 한없이 약했다고 한다. 그중 양녕대군은 3명의 아들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얻은 적장자였기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11세에 왕세자가 되었다.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시에 능통하고 경회루의 현판을 적었을 정도로 글솜씨가 좋았으며 통솔력 있는 모습을 보였기에 어려서부터 태종의 기대를 받았으나, 워낙 자유분방한 성품인지라 공부하기를 싫어했고 예의범절이 엄격한 궁 생활을 힘들어했다. 게다가 세자가 된 이후에는 하루 종일 서연 같은 공부만 억지로 시키다 보니 점차 학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꾀를 내기 시작했는데 일례로 복습을 핑계로 일과를 하지 않거나, 병을 핑계로 서연에 참석하지 않으려 한 것이 있다. 그럼에도 태종은 세자가 활쏘기에 재능을 보이는걸 좋게 여겨서 활쏘기를 익히도록 명하기도 하고 사냥에도 종종 데려가곤 했다.

 

그런데 세자가 성인이 될수록 기행을 일삼으며 여자 문제를 일으키자 태종은 점점 심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태종 10년(1410년) 양녕의 나이 17살에는 사신의 연회에서 반한 기생 봉지련을 궁으로 불러들이니 태종은 봉지련에게 곤장 때리고 가둔 후 비단을 주고 도성 밖으로 쫓아내버렸으며, 태종 13년(1413년) 양녕의 나이 20살에는 평양 기생 소앵을 불러들이거나 궁 안에서 매를 키우자 세자궁의 내시들을 모두 내치게 했다. 이후 태종이 세자를 야단치니 잠시 학문에 열심히 힘쓰는 듯 했으나, 이것도 얼마 안가 또다시 궁에 창기를 들이고, 상왕의 기생 초궁장과 사통하고, 매형의 기생 칠점생을 취하려고까지 하니 동생 충녕대군이 세자인 양녕대군의 권위에 도전하며서까지 충고 하게 될 정도 양녕대군은 여색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곽선의 첩 어리와 간통하여 아이를 낳은 것도 모자라 장인 김한로의 집에 숨겨두고 몰래 만나기를 반복하니 태종은 더 이상 참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때까지 태종은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세자가 어떠한 기행을 해도 참고 넘어가려 했고, 세자를 꼬여냈다는 명분으로 세자 대신 주변 인물들을 처벌하며 반성의 시간을 주며 노력했다. 그럼에도 세자는 오히려 태종을 조롱하는 듯한 항의문을 작성해서 반항을 했고 결국 화가 난 태종은 태종 18년(1418년) 6월에 25살의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22살의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같은 달 끔찍이도 예뻐했던 막내 성녕대군이 죽어서 그랬을까? 아님 양녕대군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다툼이 생기는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 두달 뒤 태종은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에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태종은 상왕이 되어도 4년간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며 상왕 정치를 이어갔고 세종 4년(1422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조선 전기에는 유학이 보편화되지 않아 남녀에 대한 차별이 적었고 자식 간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태종은 28명이나 되는 자신의 자식들을 두루 예뻐했다고 한다. 그 중 태종은 원경왕후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을 가장 예뻐했는데, 성녕대군은 원경왕후가 41세에 낳은 늦둥이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이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들이 성녕대군을 어찌나 끔찍이도 사랑했는지 이미 혼인한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궁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외 신빈 신씨의 자식과 관련된 일화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궁인 출신인 신빈 신씨는 태종이 총애하던 후궁으로 그녀의 자식들에게도 좋은 혼처를 찾아주고 싶어 했다. 당시 궁주였던 그녀의 딸을 위해 점쟁이를 불러 정해년 이전에 출생한 청년들의 팔자를 받아오게 했는데 청년 중 한명의 아비인 이속이 "궁인의 자식이라면 내 아들은 죽었고, 명문가 권씨의 자식이라면 내 아들은 살았다."라는 무례한 말을 전하자 화가 난 태종은 이속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관노비로 만들었으며, 그의 아들에게는 평생 금혼령을 내려버렸다. 이후 이같은 상황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모든 국혼은 후보자 단지를 수집하여 간택하는 법을 제도로 정하게 되었다.

 


※ 참고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태종 이방원의 관계

태종 이방원과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사이가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이방원은 어렸을적 둘째 형 이방과와 함께 과거를 보기 위해 개경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개경에서 태조의 둘째 부인 강씨와 함께 머물면서 어린 이복형제들과도 잘지냈다고 한다. 신덕왕후 강씨도 함경도에 있는 첫째 부인 한씨를 대신하여 이들을 뒷바라지했고, 결국 이방원은 나이 17살에 과거에 급제에 성공했다. 스무살도 되지 않아 급제한다는 것은 당시에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이방원이 아무리 총명했다고는 하나 변방의 무사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방원의 과거 급제에는 개경 명문가 신덕왕후 강씨 집안의 인맥과 물질적 기여도가 한몫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을 것 이다.

 

이처럼 서로 잘 지내서 그런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최영 장군은 도성 가까이에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가족들을 볼모로 삼으려 했는데 태종 이방원은 당시 포천에 있던 신덕왕후 강씨와 어린 동생들을 동북면으로 피신시켰으며, 피신 가는 길에 양식이 떨어지자 민가에서 밥을 얻어 먹였을 정도로 이방원은 작은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의 나이 겨우 열한살 차이로 조선이 개국될 때 이방원은 26살, 신덕왕후 강씨는 37살의 나이었다. 그러다 보니 잘 통해서였을까? 이들은 서로가 협력하며 원하는 일들을 해결해나갔고, 결정적으로 태조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신덕왕후 강씨는 생모 한씨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이방원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와 함께 개경으로 오게 했으며,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던 정몽주를 이방원이 암살하자 신덕왕후 강씨는 이방원의 편을 들어줄 정도로 이때까지는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것 같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태종이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를 띠고 고하기를 "공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 태조실록 中 - 

그러나 이렇게 끈끈했던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사이는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급속도로 틀어지게 된다.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가 왕이 된지 한 달 만에 자신의 아들 이방석을 왕세자로 만들었으며, 세자에게 걸림돌이 되는 이방원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가 죽은 뒤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이방석은 물론 그녀의 아들 이방번과 사위를 모두 죽였고, 태종 8년(1408년) 태조가 죽은 뒤에는 그동안 감춰뒀던 신덕왕후에 대한 분노를 크게 표출하여 신덕왕후 강씨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물론, 그녀의 소생들을 모두 서자로 강등시켜 버렸다. 또한 태종 9년(1409년)에는 정동에 있던 그녀의 정릉을 파괴하여 도성 밖으로 이전시키고 기존에 있던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서 사신을 맞는 객사인 태평관 건축에 사용하게 했으며, 남아있는 정릉의 병풍석은 청계천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하도록 했다.

 

▲ 이미지 출처 : YTN NEWS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 이외에도 강씨에 대한 태종의 분노는 서얼 금고령(서얼차대법, 서자의 관직을 제한하는 신분 차별 제도)과 같은 적서 차별 제도가 만들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태종에 의해서 후궁으로 격하된 신덕왕후 강씨는 현종 때가 되서야 복권되어 위패가 다시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고, 무덤도 왕릉으로 복구되었다. 

 


※ 참고 : 사관에 시달렸던 태종 이방원과 사관에 관한 일화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이 유난히 사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사관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나라의 중대사나 민가의 사건 사고들을 모두 기록했던 관리로 사관이 적은 기록지를 '사초'라고 한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사관들의 자부심과 사명감이 대단했기에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치우침 없이 보고 들은 것과 자신의 주관도 모두 기록했는데 일례로 태조가 신하들을 시켜 사초를 올리게 하자 사관 신개는 "사관은 거짓으로 칭찬하지 않으며 나쁜 점을 숨기지 않으니, 임금이 이를 보면 반드시 노하게 될 것이므로 감히 임금에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며 임금에게 딱 잘라 거절을 표현했고, 정종 때는 술자리에 찾아온 사관을 돌아가게 했으나 끝까지 남아있다가 '술이 취하니, 임금이 일어나 춤추고, 밤이 되어 파하였다.'라는 것까지 기록해두기도 했다.

 

이런 사관의 집요함은 태종 때 태종의 스토커라고 불리게 된 사관 '민인생'을 등장하게 만들었다. 태종 1년(1401년) 태종은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던 중 사관에게 왜 왔냐고 물었는데 "신이 사관으로서 감히 직무를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관 민인생이다. 그는 태종의 사적 영역인 편전에 까지 들어갔는데 태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인물로 태종은 그 모습에 기가 찼는지 이때까지는 그저 웃어 넘겼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두 달 뒤, 태종이 편전에서 업무를 시작하려던 때 밖에서 누군가 엿보고 있으니 "저게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고, 좌우 대신이 "사관 민인생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태종은 더 이상 민인생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민인생을 유배 보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민인생 유배 11년 후 태종 12년(1412년)에 사관 민인생의 이름이 다시 태종의 입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당시 대사헌은 사관들도 조계에 참석할 수 있도록 태종에게 요청했는데 태종이 말하길 "예전에 사관 민인생이 경연 때 병풍 뒤에서 엿듣고, 곧장 내연으로 들어왔었다. 또 내가 들에 나가 매사냥을 할 때 얼굴을 가리우고 따라왔으니, 이런 것은 모두 음흉한 짓이다."라고 할 정도로 민인생은 태종에게 오랫동안 사관 트라우마를 남겨줬던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목숨을 각오하면서까지 태종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는 점에서 민인생 같은 사관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사적 기록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태종 때 사관과 관련된 아주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태종 4년(1404년) 태종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게 되자 하도 사관에게 당해서 그런지 주위를 좌우로 둘러보고는 이 일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으나, 이미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사관은 태종이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것까지 모두 사초에 적어버려서 태종실록에까지 모두 기록되어버렸다. 이처럼 사관들의 집요함은 왕이 일개 신하를 신경 쓰고 조심하게 만들어 역사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 이미지 출처 : YTN NEWS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 사관은 정 7품 이하의 낮은 벼슬이었지만,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임금을 평가하는 것마저 두려워하지 않아야 했기에 자격조건이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사관이 되려면 문과 급제자 중에서 성적이 우수하고 친가와 처가를 통틀어 흠이 없어야 하며 미혼은 추후 어떤 가문과 맺어질지 모르니 사관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 기록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관들의 소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사관이 적은 '사초'는 임금이라도 함부로 볼 수 없도록 했고, 예민한 내용은 임금이 죽은 뒤에야 제출할 수 있도록 보장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당파의 색이 덧붙여지게 되면서 사초의 공정성이 퇴색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생기게 되었다.

 


※ 참고 : 태종실록(총 36권)에 적힌 주요 사건 사고

1401年
태종 1년 1월 공·후·백의 작호를 부원 대군·부원군·군으로 고치다.

태종 1년 4월 하윤의 건의에 따라 사섬서를 설치하여 저화를 맡게 하다.

감춘추관사 하윤에게 《고려사》를 바치게 하다. 

태종 1년 6월 사신이 받들고 온 명나라 황제의 고명(태종을 조선 국왕이라 칭하고 황제의 도장을 내려 줌). 임금이 가까이 한 궁인을 힐문한 정비전의 시녀·환관을 내치다.

태종 1년 7월 문하부를 의정부로, 낭사를 사간원으로, 삼사를 사평부로 관제를 개편. 안성의 학장 윤조 등의 상언으로 등문고를 설치하다. 권중화의 상소문(*종모종부법 : 양인이 천인 여자와 자식을 낳았을 때 양인이나 천인이 될 수 있고, 둘다 천인일 경우 자식은 오직 천인이 되는 것을 법으로 정함)
태종 1년 8월 억울한 사람은 등문고를 치도록 하자는 의정부의 상소. 등문고의 이름을 신문고로 고치다.

태종 1년 11월 권근의 건의에 따라 정몽주·김약항 등에게 증직하다. 사간원에서 관찰사를 각도에 보낼 것을 건의하다.
신문고가 설치되다. 하윤 등에게 신문고 유래의 설치 등에 대해 묻다.

 

1402年

태종 2년 1월 3년마다 무과법을 시행하다. 예조에 역대 왕조의 빈첩의 제도를 상고하게 하다.

태종 2년 2월 면복을 내린다는 명황제의 칙서.

태종 2년 3월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태종 2년 4월 이지란의 졸기. 권씨를 정의 궁주로, 제를 원자로 봉함.

태종 2년 6월 순군 만호부를 순위부로 고치다. 하윤·권근·이첨에게 《삼국사》를 수찬하게 하다. 

태종 2년 8월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사람마다 호패를 주고 호구 장부를 만들다. 

진산 부원군 하윤이 이씨 왕조를 예찬한 《조선성덕가》 12장을 올리다.

태종 2년 11월 안변 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일으키다. 조사의의 군사가 안주에 이르러 스스로 궤멸하다.

태종 2년 12월 대간이 회안군 부자의 문제 및 동북면 사병 조직의 혁파 등을 상소.

 

1403年

태종 3년 2월 주자소를 설치하고, 이직·민무질·박석명·이응을 제조로 삼다. 

태종 3년 4월 고명·인장·칙서를 가지고 황제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다. 

태종 3년 6월 사간원에서 경상도의 조세 운반 방법과 사전의 혁파 등에 관해 건의하다.

태종 3년 8월 하윤·권근·이첨이 새로 편수한 《동국사략》을 바치다.

 

1404年

태종 4년 2월 임금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사관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다.

태종 4년 5월 관리의 공무수행시 예절 및 부녀자 외출시의 법도 등을 규정하다.

태종 4년 8월 원자 이제를 왕세자로 삼는 교서를 내리고, 죄인을 사유하다.

태종 4년 9월 태조 셋째 아들 의안 대군 이방의의 졸기.

태종 4년 10월 한양과 무악 중에 어느 곳을 도읍으로 정할 만한 것인지를 논의하다. 돈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결정하고 이궁을 짓도록 명하다. 지사간원사 오승 등이 서인이 된 이백강과 공주와의 이혼을 청하다.

 

1405年

태종 5년 1월 처음으로 현의·숙의·찬덕·순덕 등 궁녀들의 관직을 두다.

태종 5년 6월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태종 5년 9월 천인이 양인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을 금하다. 국사를 한양으로 옮기다.

태종 5년 10월 이궁이 완성되다. 이궁의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다.

 

1406年

태종 6년 1월 처음으로 별와요를 설치하고, 여러 도에서 와장을 징발하다. 

태종 6년 4월 광연루가 완성되자, 감역 제조 이직 등과 함께 낙성을 축하하다.

태종 6년 5월 태상왕의 빈인 원씨를 성비로, 유씨를 정경 궁주로 삼다.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도록 명하다.

태종 6년 6월 일식의 예측을 잘못한 서운관 부정 박염을 동래로 귀양보내다.

태종 6년 8월 임금이 세자 이제에게 전위코자 하니 백관이 반대하다. 남재·권근 등이 전위 불가 상소. 결국 환관 노희봉을 시켜 옥새를 세자궁에 보내다. 백관의 전위 불가 주장에 옥새를 잠시 대궐로 옮겼다가 다시 세자궁으로 보내다. 세자에게 전위한다는 명을 철회하다.

태종 6년 11월 유학·무학·이학·역학·음양풍수학·의학·자학·율학·산학·악학 등의 십학을 설치하다.

 

1407年

태종 7년 1월 태상왕이 새 전각을 절로 만들고 ‘흥덕사’라고 사액하다.

태종 7년 3월 성균관 문묘가 완성되다.

태종 7년 8월 덕수궁에 나아가 경순 궁주의 죽음을 조상하다. 《속육전》 수찬소를 설치.

태종 7년 10월 둘째 아들 이호를 효령군으로 봉하다.

 

1408年

태종 8년 2월 셋째 아들을 충녕군으로 봉함. 충녕군이 우부대언 심온의 딸에게 장가들다. 

태종 8년 5월 태상왕이 별전에서 승하하시다.

태종 8년 8월 태상왕의 존시를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으로, 묘호를 태조로 하다.
태종 8년 9월 여흥 부원군 민제의 졸기.

태종 8년 10월 출가한 딸도 친정 부모를 위해 기년복을 입게 하다.
태종 8년 11월 호구법을 다시 실시하다.

 

1409年
태종 9년 2월 정릉을 도성 밖의 사을한산으로 천장하다.

태종 9년 4월 시골 사람 손귀생이 창덕궁을 구경하고 광연루까지 들어와 구금되었으나 석방하다.

태종 9년 5월 세자 이제 등 4형제를 불러 화목하게 지낼 것을 타이르고 눈물을 흘리다.

태종 9년 9월 민무구가 세자 이외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던 일을 탄식하면서 여러 은밀한 얘기를 하다.

태종 9년 10월 상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불노를 공주에 안치하다. 11도에 도절제사 각 1인과 그 밑에 절제사 또는 첨절제사를 임명하다. 강원도 도절제사를 혁파하고 관찰사가 겸하도록 하다.

 

1410年

태종 10년 3월 제주에 있는 민무구·민무질에게 자결하게 하다.

태종 10년 10월 저화를 통용시킬 방법에 대하여 의논하고 신·구도에 화매소를 설치하다.
태종 10년 11월 세자가 몰래 기생 봉지련을 궁중에 불러 들이다.

 

1411年

태종 11년 2월 일본 국왕이 우리 나라에 없는 코끼리를 바치니 사복시에서 기르게 하다.

태종 11년 6월 지금부터 6월에 녹봉 내주는 것을 항식으로 삼다. 

태종 11년 7월 경기 수군 도절제사를 혁파하여 도만호로 그 사무를 맡게 하다. 경복궁 안에 개천을 파도록 하다.

태종 11년 9월 예조에서 비빈의 제도를 올리니 1빈 2잉으로 제도를 삼도록 하다.

태종 11년 12월 일본 국왕 사인 등에게 《대장경》 1 부를 주다.

 

1412年
태종 12년 2월 개천 도감을 행랑 조성 도감으로 삼아 시전을 건설하다.
태종 12년 5월 효령군·충녕군을 대군으로 이원생·이군생을 부정윤으로 삼다. 태조의 후손이 아니면서 재내제조·원윤·정윤을 봉하거나 외척을 군으로 봉하는 것을 없애다. 경복궁의 새 누각의 이름을 경회루라고 명하다.

태종 12년 6월 기자와 단군에게 제사드릴 것을 의논하다. 세자에게 큰 글씨로 경회루 편액을 쓰도록 명하다. 정종의 처 순덕 왕대비 김씨의 졸기. 임금이 빈전에 가서 곡하다.
태종 12년 10월 화산군 장사길의 기첩 복덕이 낳은 장씨를 순혜 옹주로 삼다. 선원록·종친록·유부록을 만들다.

 

1413年

태종 13년 1월 동서 양계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다.

태종 13년 2월 통제원 남교에서 머무르다. 임진도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 혜정교 근처의 아동들이 주상·효령군·충녕군의 이름을 빌어 타구 놀이를 하다. 《경제육전》을 반행하다.(속육전으로 반포 시행함).

태종 13년 3월 《태조실록》 15권이 완성되다. 세자가 평양 기생 소앵과 놀아난 문제로 김매경·박수기 등을 치죄하고 파직시키다.
태종 13년 7월 수군의 만호·천호의 칭호를 다시 정하다. 여러 맹인들이 스스로 명통사에 모여서 비를 빌었다.
태종 13년 9월 대사헌 윤향이 종친의 서얼 구별 문제와 공신전·별사전의 세습 문제로 상소하다.
태종 13년 11월 처음으로 홍원 현감을 설치하다. 명통사의 맹인들에게 쌀을 하사하다.

 

1414年
태종 14년 1월 효령 대군의 이름을 호에서 보로 고치다. 의정부에서 건의한 대군·군·원윤·정윤·부원윤·부정 윤을 봉하는 법식을 승인하다.

태종 14년 2월 병조 판서 이응의 건의로 마패법을 세우다.
태종 14년 4월 별와요를 혁파하다. 노비 변정 도감을 설치하고 관원을 두다. 정부조직 개편 일을 육조에서 나누어 맡도록 개혁하다. 의정부에서 건의한 육조가 맡아야 할 일에 대한 계목을 승인하다.
태종 14년 5월 영춘추관사 하윤을 불러 《고려사》를 다시 찬정하게 하다.

태종 14년 6월 처음으로 관청 및 개인의 여종이 양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의 신분을 갖도록하다.(*노비종부법 시행)
태종 14년 7월 《대장경》을 일본국에 보내고 《대반야경》을 규주에게 주다.
태종 14년 10월 혼인하는 예식을 정하라고 명하다. 일본어를 익히도록 사역원에 명하다.

 

1415年
태종 15년 1월 소격전 제조 김첨이 《성수경》을 올리다. 세자전에 불량한 공장들의 출입이 번다하므로 나무라다. 
태종 15년 4월 태종의 셋째 딸 경안 궁주의 졸기(나이 23살).
태종 15년 5월 상왕의 기생으로 세자와 사통한 기생 초궁장을 내쫓다.
태종 15년 6월 대간과 형조에서 불충한 말을 한 민무휼·민무회를 탄핵하다.
태종 15년 8월 처음으로 이조에 대간을 고공하라고 명하다.
태종 15년 12월 이조에서 아뢴 대로 진·도 별감을 고쳐 도승으로 하다.

 

1416年
태종 16년 1월 세자가 충녕 대군의 충고를 듣고 부끄러워하다. 각 고을에 있는 아전들의 갓과 의복을 개정하다. 《홍무예제》에 의하여 양관·의상·패수를 만들다. 관복색을 설정하다. 민무휼·민무회가 모두 자진하다.
태종 16년 2월 충녕 대군의 총명함을 기뻐하다. 
태종 16년 3월 인덕궁에 나아가니 상왕이 술자리를 베풀다. 세자가 충녕 대군의 충고를 꺼려하다. 세자가 피곤을 이유로 서연관을 물리다. 조관의 관복 제도를 예조에서 상정하다.
태종 16년 4월 좌의정 하윤이 찬진한 《동국략운》을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하다. 점술서인 《개원점》을 올리라고 춘추관에 명하다. 
태종 16년 6월 중앙과 지방에서 호패제도를 폐지하다. 정도전·황거정 자손의 금고를 해제하게 하다. 하윤·한상경·변계량이 《고려사》를 3분하여 개수하다. 하윤이 졸하여 이루지 못하다.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에게 직첩을 주라고 하다. 
태종 16년 8월 예조에서 아뢴 대로 중에게 도첩을 주다. 고려의 끝 임금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삼고, 능 아래에 치제하다.
태종 16년 11월 진산 부원군 하윤의 졸기.

 

1417年
태종 17년 2월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를 간통하여 궁중에 들여온 사건.

태종 17년 3월 구종수·구종지·이오방 등을 논죄한 삼성의 상소. 이숙번을 다시 함양으로 추방하다.
태종 17년 4월 세자의 외도를 도운 이귀수를 참하고, 진기·방유신을 장형에 처하다.
태종 17년 윤5월 세자가 더위를 핑계하여 정강하다 빈객 조용 등이 세자의 비행을 들며 간하다.
태종 17년 9월 적자·서자의 봉작하는 법을 정하다. 이속을 혼사를 속인 죄로 폐하여 서인을 만들다. 효령 대군·충녕 대군 등 종친의 봉작을 내리다.
태종 17년 11월 이속을 관노로 정하고 가산을 적몰하다.

 

1418年
태종 18년 1월 성녕 대군이 완두창이 나서 위독하였다.
태종 18년 2월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 대군 이종의 졸기(나이 14살).
태종 18년 3월 임금이 조말생에게 세자의 불의를 말하다. 조계청을 궁 서쪽에 짓다.
태종 18년 5월 서연과 숙위사를 혁파하다. 세자 이사 유창 등이 세자로 하여금 장인 김한로와 절연할 것을 아뢰다.
태종 18년 5월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 대군으로서 왕세자를 삼다. 의용위를 설치하다. 
태종 18년 8월 임금이 세자에게 국보를 주다. 왕세자가 내선을 받고 근정전에서 즉위하다. 심온을 청천 부원군으로 삼다. 

 


조선 왕실 태종 가계도

ㆍ태종의 정비 : 원경왕후 민씨(정비)

ㆍ태종의 후궁 : 의빈 권씨, 명빈 김씨, 소빈 노씨, 신빈 신씨, 선빈 안씨, 효빈 김씨, 정빈 고씨, 숙의 최씨, 숙의 이씨, 숙공궁주 김씨, 순혜옹주 장씨, 서경옹주 금씨, 혜선옹주 홍씨, 의정궁주 조씨, 신숭궁주 이씨 등

 - 의빈 권씨(정의궁주) : 태종 2년 후궁 제도를 법제화한 후 최초로 들인 사대부 출신 간택 후궁. 태종은 그녀를 왕비와 같은 예우로 들이려 했으나, 원경왕후가 울며 반대하니 가례색을 없애고 별궁에서 맞아 들이게 된다. 태종은 그녀를 위해 대궐 북쪽에 누각을 짓고 연못을 만들어 주었을 정도로 총애했는데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 의빈에 봉해졌고 정혜옹주를 낳았다.

- 명빈 김씨 : 태종 11년에 정식 간택된 후궁으로 태종의 재위 시절 유일하게 정1품 '빈'의 지위에 책봉되었다.

- 소빈 노씨(소혜궁주) : 태종 11년에 정식 간택된 후궁으로 고종 때 소빈으로 추증되었으며, 숙혜옹주를 낳았다.

- 숙공궁주 김씨 : 태종 11년에 명빈과 소혜궁주와 함께 책봉되었다. 그러나 아비의 죄로 세종 3년에 친정으로 내쫓아졌다.

- 신빈 신씨(신녕옹주) : 원경왕후의 나인 출신으로 3남 7녀를 낳았을 정도로 태종의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병간호를 열심히 하니 세종 4년에 신녕궁주로 봉해졌고 고종 때 신빈으로 추증되었다. 원경왕후는 신빈 신씨를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친밀하게 대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원경왕후 사후 의빈과 명빈 대신 실질적으로 내명부를 총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자녀로는 함녕군(이인), 온녕군(이정),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소신옹주(소선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를 낳았다.

- 선빈 안씨(숙선옹주) : 궁인으로 입궁했다가 태종의 후궁이 되어 2남 3녀를 낳으니 세종 3년에 숙선옹주에 책봉되고, 고종 때 선빈으로 추증되었다. 자녀로는 혜령군(이지), 익녕군(이치), 소숙옹주, 경신옹주를 낳았다.

- 효빈 김씨(효순궁주) : 원경왕후의 집안의 노비였는데 태종이 왕자 시절 궁 밖에서 경녕군(이비)을 낳으니 원경왕후의 투기가 지나칠 정도로 심하여 모자를 죽이려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승정원일기를 통해 효빈 김씨는 효순궁주였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고종 때 효빈 김씨로 추증되었다.

- 정빈 고씨 : 궁인 출신 후궁으로 태종 11년에 근녕군(이농)을 낳았다.

- 숙의 최씨 : 태종의 후궁으로 1남 1녀로 기록되어 있으며 자세한건 알려진 것이 없다. 자식으로는 희령군(이타)을 낳았다.  

- 숙의 이씨 :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자식은 일곱번째 서자인 후령군(이간)을 낳았다.

- 순혜옹주 장씨 : 개국공신 장사길의 서녀로 일찍이 궁으로 들어와 후궁이 되었고, 태종 12년에 순혜옹주로 봉해졌다.     

- 서경옹주 금씨 : 사가에서부터 들인 첩실로 태종 18년 궁에 들어왔다.

- 혜선옹주 홍씨 : 이름이 가희아인 보천의 기생 출신으로 태종 14년에 혜선옹주로 칭하고, 태종 18년에 가이옹주로 하여 궁에 들어왔다.

- 의정궁주 조씨 : 조뇌의 딸로 세종 4년에 가례색(왕 또는 왕세자의 가례 담당 부서)에서 정식으로 뽑은 후궁이었으나, 태종이 노쇠하여 입궁하기 전에 승하해버렸다.

- 혜순궁주 이씨 : 이운로의 딸로 과부로 살자 세종 4년에 태종이 후궁으로 삼았다.

- 신순궁주 이씨 : 개국공신 이직의 딸로 과부로 살자 세종 4년에 태종이 후궁으로 삼았다.

- 후궁 김씨 : 숙안옹주를 낳았다.

   

※ 조선 초기에는 왕실 체제가 정비되지 않아 공주와 옹주, 궁주의 사용이 혼용되었다. 

 


※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글의 대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나, 약간의 야사가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 참고 사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바로가기

※ 관련 드라마 : KBS 용의 눈물, SBS 육룡이 나르샤, KBS 정도전, KBS 장영실, SBS 뿌리 깊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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