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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지덕체가 완벽한 조선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 문종

by 사용자 박또니 201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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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대 문종 [이향]

출생 사망 : 1414년 10월 03일 ~ 1452년 5월 14일(39세)

재위 기간 : 1450년 2월 22일 ~ 1452년 5월 114일(2년 3개월)

 


대리청정만 8년! 가장 준비된 임금이었으나 가장 저평가된 임금 문종.

문종은 세종이 충녕 대군이었던 시절 사저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세종이 세자가 되면서 5살에 궁에 들어와 원자가 되었고, 8살에 왕세자가 되어 약 30년간 세종을 보필하면서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준비된 임금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문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주역 중 한 명이 되었는데 한동안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측우기'는 문종의 발명품이라는 것이 최근 알려지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세종을 빼닮아 영특함이 남달랐던 문종은 태종의 예쁨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하루는 태종이 명에서 온 사신들에게 어린 문종을 보여주며 어찌나 손주 자랑을 했는지 해가 지는 지 모를 정도로 칭찬을 하다가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잔치를 파했을 정도였다. 사신들도 문종을 어찌나 예뻐했는지 세종실록에는 "사신이 말하길, 10살의 세자의 용모가 옥처럼 부드럽고 겸손하니 사신이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했으며, 연회를 끝내고 세자가 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자 하여 말을 앞으로 나오게 하니 예로써 굳이 사양했으나 억지로 시키니 세자가 그제야 말에 올랐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 영특함과 외모의 수려함 정도로 남달랐다는 것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 영상 출처 : 역사저널 그날

성인이 된 문종은 1445년 31세부터 약 8년간 세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세종 승하 후 37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약 2년 3개월 만인 39세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많은 미디어에서는 그저 병약한 왕으로만 그려놓곤 한다. 그러나 그가 왕위를 잡고 있었을 때에는 단종 때 설치고 다녔던 수양대군마저도 납작 엎드려 그 속내를 가리고 다녔을 정도로 문종을 무서워 했다. (그러니 문종이 수양 세력이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 훗날 문제가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문종은 종기가 있음에도 대리청정 기간과 왕위에 있던 기간만 합해도 총 10년으로 그간 세종을 도와 국정을 정비하며 화차 등의 신무기를 개발하고, 《진법》과 같은 병법서를 편찬하여 국경을 경비하는데 힘썼으며, 역사서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새로 편찬, 각종 사회적 제도를 재정립하는 등 그가 남긴 업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서는 제대로 다뤄지고 있지 않은 것이 실정이다.

 

참고로 문종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게 된 이유에는 종기만이 있는게 아니었을 것이다. 세종이 승하하기 4년 전 어머니인 소헌왕후가 죽자 3년상을 치뤄야치러야 했고, 몸이 채 건강해지기도 전 1년 뒤에는 세종이 승하하면서 또 다시 3년상을 치러야 했는데 이 3년상이라는게 상 중에는 고기를 먹지를 못하고 여러 번 제사를 지내며 죄인처럼 지내다보니 몸이 쇠약해져 병을 얻고 심지어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만약 소헌왕후와 세종이 연달아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문종이 어린 단종만을 남겨두고 일찍 떠났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유독 처복과 자식복이 없던 임금.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비가 없던 임금 문종.

세종은 본격적으로 왕세자의 가례를 알아보던 중 양녕대군이 세자였을 때 14세에 혼인했던 것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왕세자는 15세에 가례를 시키겠다고 대신들에게 공포했다. 그러나 세종 자신의 몸상태가 점점 나빠져서 그랬는지 돌연 마음을 바꿔 세종 9년(1427년) 3월 왕세자의 가례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고, 2주 뒤인 4월 9에 휘빈 김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게 되니 문종의 나이 14살에 첫번째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세종이 휘빈 김씨를 간택한 이유는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의 조카이자 명문가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세자인 문종은 딱히 세자빈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대신 효동과 덕금이라는 두시녀에게 마음을 두게 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휘빈은 혼인 후 2년 동안 자신을 멀리한 세자에겐 서운함을, 두 시녀에겐 질투를 느끼고는 시녀 호초를 불러 남자를 미혹시킬 수 있는 '압승술'을 알려달라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호초는 결국 휘빈에게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 조각을 불에 태워서 그 가루를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자신은 사랑을 받고 신발의 주인은 배척을 받는다." 라는 술책과 또 다른 여러 술책을 알려주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휘빈은 호초를 불러 계속해서 술책을 요구했는데 이때 휘빈 사가의 여종이자 세자궁의 시녀가 된 순덕은 상전을 꾀어낸 호초와 말다툼을 하게 되면서 소헌왕후 상궁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소헌왕후와 세종에게 이야기가 전달되면서 휘빈 김씨는 폐출되어 사가로 쫓겨나고 호초는 참형을 받게 되었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씨를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뜻밖에도 김씨가 미혹시키는 방법으로써 압승술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과인이 듣고 매우 놀라 즉시 궁인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더니, 김씨가 대답하기를, "시녀 호초가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므로 곧 호초를 불러 들여 친히 그 사유를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주빈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주빈께서 강요하므로 비가 드디어 가르쳐 말하기를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오니, 효동과 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했는데 김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내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 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께서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에 비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가르친 두 가지 술법의 전자는 박신의 버린 첩 중가이에게서 전해 들었고, 후자는 정효문의 기생첩 하봉래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세자궁에 순덕이라는 시녀가 있는데 본래 김씨의 집종이었다. 일찍이 김씨의 약낭 속에 베어 넣은 가죽신의 껍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괴이하게 여겨, 호초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빈께 이런 짓을 하라고 가르친 자는 누구냐." 하고 즉시 그것을 꺼내어 감춰버렸다 한다. 과인은 이 말을 다 듣고 즉시 순덕을 불러다가 거듭 물으니 다시 다른 말이 없었으며 또 말하기를, "비가 일찍이 주빈의 어머니 집에 가서 가죽신의 껍데기를 내보이고 이어 그 까닭을 말하였습니다. 그 가죽이 아직도 비에게 있습니다." 하고 꺼내어 바치는 것이었다. 이에 과인은 중궁과 같이 김씨를 불러다가 친히 정상과 사유를 물으니 일일이 자복하였고, 베어낸 신의 가죽이 갖추어 있고 증언이 명백하여 전세의 애매하고 의사한 일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7월 20일  - 

이후 세종 11년(1429년) 휘빈 김씨를 폐빈시키고 곧바로 세자빈을 뽑기 위해 가례색이 설치되며 처녀들의 혼인이 금지되었다. 세종은 폐세자빈이 외모 때문에 문종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 세자빈 간택 방식을 두고 외모를 우선으로 처녀를 뽑게 하니 3개월 뒤 순빈 봉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문종의 나이 16살에 두번째 부인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세자빈 역시 문종의 취향이 아니였던 것인가? 이번엔 혼인 후 7년만에 폐세자빈이 되고 말았다.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먼저, 세자빈은 그 예쁜 얼굴로도 문종에게 소박을 맞게 된 것인지 2년간 아이 소식이 없자 세종이 3명의 승휘를 뽑아 동궁의 후궁으로 삼았는데 그 중 권승휘가 임신을 하게 되자 시기하고 원망하여 궁이 떠나갈 정도로 울어댔다고 한다. 또한, 지방에서 뽑혔기 때문에 유교의 예를 모르니 실수를 하더라도 세종과 중전이 배려해준 것이 많았으나 결정적으로 궁궐의 여종 소쌍과 잠자리를 하고 집착하며 세자빈의 지위를 이용해 소쌍에게 욕구를 분출한 것을 소헌왕후에게 들켜버렸다. 이에 세종은 이와 같은 일이 너무나 추잡스러워서 교지에는 다른 이유를 들어 폐비를 하겠다고 기재했음에도 결국 실록에는 사관의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적음으로써 순빈 봉씨의 음란한 행위는 알려지게 되었다.

 

▲ 영상 출처 : 역사저널 그날

 

"처음에 김씨를 폐하고 봉씨를 세울 적에는 그에게 옛 훈계를 알아서 경계하고 조심하여 금후로는 거의 이런 따위의 일을 없게 하고자 하여 여사로 하여금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는데, 봉씨가 이를 배운 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 하면서, 학업을 받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열녀전》을 가르치게 한 것은 나의 명령인데도 감히 이같이 무례한 짓을 하니 어찌 며느리의 도리에 합당하겠는가.
또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며,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며, 또 좋은 음식물을 얻으면 시렁 속에 갈무리해 두고서는, 손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서 먹고 다시 손수 이를 갈무리하니, 이것이 어찌 빈이 마땅히 할 짓이겠는가. 또 내가 중궁과 함께 항상 세자를 가르쳐서 마땅히 빈궁을 접대하도록 했는데, 세자가 며칠 동안 왕래하였다가 그 후에 드물게 가매, 봉씨가 노래를 지어 궁궐의 여종으로 하여금 이를 부르게 하니 그 대개는 세자를 사랑하는 내용이었다. 또 중궁이 궁인을 대우하는데 매우 은혜와 예절이 있었으므로, 궁인이 죄가 있으면 몸소 책망하거나 벌주지 않고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이를 결정하였는데 봉씨는 여러 번 투기 때문에 몸소 궁인을 구타하여, 혹 어떤 때에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니, 어진 부인이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시골의 여자로 궁중에 들어왔으니, 마땅히 공손하고 잠잠하여 자기 몸을 지켜 경계하기에 여가가 없을 것인데도, 교만하고 무례함이 이와 같았다 ... 그대들은 마땅히 이를 알아야만 될 것이며, 또 세 대신들에게 전해 말하여 내가 마지못하여 세자빈을 폐출하는 뜻을 알리기 바란다."
-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1월 7일 -

※ 야사에서는 순빈 봉씨가 폐출된 이후 사가에 돌아가 친정 아버지 봉여에게 목졸라 살해했다든지 자결을 권했다라든지 하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친정 아버지인 봉여는 폐세자빈이 되기 3개월 전 이미 병사했기에 사실이 아니다.

 

두번째 세자빈이 퇴출되고 나서 신하들은 어서 세자빈을 새로 들일것을 요청했으나, 가뭄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었고 세번이나 가례를 올리기에는 세종이 미안하고 낮부끄러웠는지 새로 가례색을 열지 않고 후궁 중에서 공주를 출산한 적이 있는 양원 권씨를 교지만 내려 세종 19년(1437년)에 세자빈으로 삼았다. 어린나이에 첫째 공주는 요절하고 말았으나 경혜공주를 낳고 왕실에서 낳은 최초의 적통 왕손인 단종이 태어나니 이런 경사가 없었다. 그러나 왕세자빈 권씨는 단종을 낳은지 하루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문종은 중전이 없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왕이 된지 2년이 되지 않아 숨을 거두게 된다.

 

이것이 단종의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역사 전문가들은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거나, 만약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살아있었다면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감히 왕권을 넘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수양대군이 왕권에 도전했던 이유는 왕실에 큰 어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다면 단종은 20대 청년이 되어 아버지를 빼닮은 성군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결국 처복이 없던 문종으로 인해 어린 단종이 피를 봐야 하는 결과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 참고 : 문종실록(총 13권)에 적힌 주요 사건 사고

1450年

문종 즉위년 2월 임금이 빈전 밖에서 즉위의 예식을 행하다.
문종 즉위년 3월 성균관 생원 탁중 등이 불사의 혁파를 상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다. 《동국병감》의 찬집을 명하다.
문종 즉위년 5월 국장 기간 내에는 흰 갓을 쓰도록 정하다.

문종 즉위년 7월 현덕빈을 왕후로 추숭함. 임시로 주자소를 폐지하다. 왕세손을 왕세자로 삼는 책문을 내리다. 신미에게 승직을 제수하다. 부마를 군이라 칭하지 말고 위라 칭하도록 하다.
문종 즉위년 9월 대자암의 극락전이 완공되다.
문종 즉위년 10월 승정원에 저화의 사용을 제한할 것을 명하다. 후령군 이간의 졸기. 문과에 권남 등 33인이 무과에 유근 등 28인에게 급제를 내려주다. 정인지 등이 불교의 숭신과 불사를 금지할 것을 아뢰다.
문종 즉위년 11월 안평 대군이 《역대제왕명현집》 등 서법 판본을 바치다. 박연이 단묘의 보수, 가동의 양성, 여악의 폐지, 악보의 간행 등을 상언하다.
문종 즉위년 12월 정몽주의 증손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길재의 손자도 20살이 되면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다.

 

1451年

문종 1년 1월 신기전 3천과 소신기전 4천을 평안도에 보내도록 하다. 정인지가 진법의 설을 극력 진언하니 이를 받아들이다. 
문종 1년 2월 화차를 만들어 서울 및 평양·안주 등에서 쓰게 하다. 이예가 은사과를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다.
문종 1년 4월 병선을 갑조하는 법을 중국에 사람을 보내어 배워오도록 하다. 탐오한 수령을 추핵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에 감찰을 보내다.
문종 1년 5월 의정부에서 평산 산성을 쌓고 다음에 서흥·해주의 산성을 쌓을 것을 아뢰다. 배의 건조는 단조만 쓰게 하고 갑조선을 만드는 규식을 적어서 의궤로 삼게 하다. 정척이 《양계지도》를 수찬하여 바치다. 화포를 쏘는 법을 익히도록 하다.
문종 1년 6월 《신진법》을 완성하다. 의정부에서 병기를 더욱 갖추기를 청하다.
문종 1년 7월 12사를 5사로 만들고 신설한 호군직을 제수하다. 심온의 직첩을 도로 주게 하였다.

문종 1년 8월 심온의 자손들에게 사환의 길을 열어 주게 하다. 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다.
문종 1년 9월 임금이 친히 악질을 구료하는 의를 지은 내용. 《속등록》을 실록을 편수할 때 아울러 편찬토록 하다. 백제 시조묘를 수즙하게 하다.
문종 1년 10월 임금이 진설을 새로 정하고 의주를 편찬하여 대신에게 보여주다. 충청도 결성현의 성을 쌓다.
문종 1년 11월 왕씨의 후예를 찾아 그 작위를 높여 제사를 이어가게 할 것을 명하다. 악질 병에 걸린 사람들을 토담집에 모아 놓고 치료할 것을 명하다. 판중추원사 이천의 졸기. 심온에게 시호를 내려 안효공이라 하다. 삼도 도체찰사 정분이 탐진에 성을 쌓고 읍을 설치하도록 청하다. 평안도와 함길도의 각 고을 수령의 임기를 60개월로 하다.
경상도 거제현의 성을 쌓다. 

 

1452年

문종 2년 2월 《세종실록》을 감수하는 사람이 모두 세종조의 신하로 이를 집현전에 상고하여 아뢰게 하다. 숙용 홍씨가 죽으니 부의를 하사하다. 영의정부사 황희의 졸기. 김종서 등이 새로 찬술한 《고려사절요》를 바치다. 
문종 2년 3월 혜정교의 북쪽 행랑이 불에 타다. 김종서가 《세종실록》을 편년체로 기록할 것을 건의하다. 성균관 앞의 길을 열어 넓히다. 횡성현 교도를 혁파하다. 중 설의로 하여금 수륙재를 거행하도록 하다.

문종 2년 4월 안평 대군 이용에게 《화엄경》과 《법화경》을 강하게 하다. 사신에게 오징어를 선사하다.
문종 2년 5월 김종서가 《세종실록》을 찬술할 때 정인지의 의견에 따라 별도로 지를 만들도록 건의하다. 내의 전순의가 임금의 병이 차도가 있다고 말하다. 유시에 임금이 강녕전에서 훙하다.

 

※ 문종실록은 편찬 중 계유정난이 발생하는 바람에 실록을 편수하던 황보인, 김종서 등이 죽임을 당해 이후 편찬의 실권은 수양대군 일파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학계 일부에서는 단종실록과 함께 그 저술 시각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결본(11권)이 생기는 바람에 문종 1년 12월과 문종 2년 1월에 대한 두달분의 기록은 확인할 수가 없다.

 

 


조선 왕실 문종 가계도

ㆍ문종의 정비 : 현덕왕후 권씨(세자빈 때 죽음)

    - 폐세자빈 휘빈 김씨 : 김구덕의 딸. 문종이 14살 때 정식 간택되어 세자빈으로 삼았으나, 2년 뒤 세자빈이 문종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녀 호초를 통해 압승술을 쓴 단서가 발각되면서 폐출되었다. 

    - 폐세자빈 순빈 봉씨 : 봉려의 딸. 휘빈 김씨가 폐출된 지 3개월만에 정식 간택되어 세자빈이 되었으나, 질투가 심해 사랑을 독차지 하지 못한것에 원망을 품고 있다가 승휘 권씨가 임신을 하게 되자 더욱 분개하며 온 궁궐이 떠나도록 울어댔다고 한다. 이후 거짓 임신 사건을 만들고,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으며, 승휘 권씨를 못살게 구는 등 범죄 행위를 일삼다가 궁궐의 여종 소쌍에게 이성적으로 집착하며 희롱하기까지하니 세종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폐출시켜 버렸다. 

    - 현덕왕후 권씨(현덕빈) : 권전의 딸. 문종이 18살 때 숙빈 홍씨, 소용 정씨와 함께 정식 후궁이 되었는데 세자빈이 연달아 폐출되니 세종은 이미 두딸을 낳았던 양원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당시 문종은 승휘 홍씨를 더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양원이 품계가 높고 아이를 낳은 의리상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자빈 권씨는 원손(단종)을 낳은 뒤 하루만에 사망하게 되었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ㆍ문종의 후궁 : 숙빈 홍씨, 숙의 문씨, 소용 유씨, 소유 권씨, 소용 정씨, 소용 윤씨, 사칙 양씨, 궁인 장씨

   - 숙빈 홍씨 : 홍심의 딸. 정식 간택된 후궁으로 순빈 봉씨가 폐출된 뒤 후궁을 세자빈으로 삼고자 했을 때, 문종은 숙빈 홍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세종에 의해서 세자빈이 되지 못했고 4년뒤 세자빈이 단종을 낳고 사망하자 중전의 자리가 비워져 있던 관계로 내명부를 다스리게 되었다.

   - 숙의 문씨 : 문민의 딸. 문종 17세 때 정식 간택된 후궁으로 자녀는 없다.

   - 소용 유씨 : 유상영의 딸. 문종 25살 때 정식 간택된 후궁으로 자녀는 없다.

   - 소용 권씨 : 권격의 딸. 문종 29살 때 정식 간택된 후궁

   - 소용 윤씨 : 윤희의 딸. 문종 35살 때 정식 간택된 후궁

   - 사칙 양씨 : 궁녀 출신 후궁

 


※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글의 대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나, 약간의 야사가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 참고 사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바로가기

※ 관련 드라마 : KBS 공주의 남자, KBS 장영실, KBS 대왕 세종, JTBC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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