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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 후대에 인정받지 못한 조선의 두번째 왕 정종 이방과

by 사용자 박또니 2019.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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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대 정종 [이방과 / 이경]

출생 사망 : 1357년 07월 01일 ~ 1419년 09월 26일(63세)

재위 기간 : 1398년 09월 05일 ~ 1400년 11월 13일(2년 2개월)

 


영안군(영안대군) 이방과. 이방원에게 떠밀려 왕이 되다.

 

정종은 태조와 절비 신의왕후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이다. 태조 7년(1398년),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은 왕세자는 적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당시 왕세자이자 이복형제인 이방석과 이방번을 살해한 후 둘째형 이방과를 왕세자로 만들었다. 태조는 가장 사랑했던 어린 아들들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여 한달 후, 이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버렸다. 그리하여 이방과는 41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하게 되었으며 조선 최초로 경복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왕이 되었다.

 

※ 첫째형 이방우가 이성계의 적장자였으나, 이방우는 세자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건국된 지 1년 만에 술병으로 사망하였기에 사실상 맏아들이자 적장자는 이방과였다. 그래서 이방원은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이방과에게 반강제적으로 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경복궁을 벗어나 개경으로 천도하다.

1399년 3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종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송경)으로 천도한다. 천도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겠지만 제일 큰 이유는 경복궁에서 벌어진 1차 왕자의 난의 영향이 제일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종실록을 보면 유난히 경복궁에서 까치와 까마귀들이 울어대는 날들이 많았는데 이 현상을 불길하게 여겼던 정종은 종척과 공신들을 모아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였고, 신하들도 이 불길함을 피하고자 옛 수도로 돌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상왕으로 물러난 태조는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좋기는 커녕 부끄러웠을 것이다. 실제 정종실록에도 정종 1년(1399년) '상왕이 옛 수도에 돌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새벽 밝기 전에 시중 윤환의 옛집에 이어하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가 있다. 태조는 개경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겠다며 한양을 신도읍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한양에서 부인을 잃고, 아들과 사위마저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뒤 쫓기듯 왕위에서 물러나 다시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주위의 평판에 민감한 이성계가 어떻게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방간 VS 이방원!  또다시 왕자의 난이 발생하다.

잠잠했던 개경 생활도 잠시 1400년, 천도 1년 만에 '2차 왕자의 난' 즉 방간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정종의 정비에게는 후사가 없어 세자 자리가 비워져 있다보니 동복형제인 이방간과 이방원은 세자가 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한편,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귀양살이를 하고 온 박포(이방원의 전 참모)는 자신을 벌했던 이방원에게 복수를 하고자 이방간과 이방원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결국 박포에게 속은 이방간은 사병을 이끌고 이방원을 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정종과 당시 상왕인 태조가 크게 진노하여 이방간에게 무기를 버리고 궁궐로 들어올 것을 명했으나, 이방간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싸움에서 패하게 된다. 그러나 1차 왕자의 난과는 다르게 이방원은 동복형제인 이방간을 쉽게 죽일 수가 없었다. 정종 또한 형제끼리의 혈전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으므로 이방간과 그의 아들을 토산으로 귀양을 보내는 대신, 그 책임을 박포에게 물어 유배지에서 처형함으로써 이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후 같은 해 정종은 재위 2년 2개월 만에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상왕으로 물러났다.

 

※ 정종이 상왕이 되면서 살아있던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토산으로 귀양을 보낸 이방간과 그의 아들은 귀양살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왕이 바뀌어도 많은 지원과 배려를 받으며 지냈다.

 

▲ 영상 출처 :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한때 웃음 참기 영상으로 유명했던 이 영상은 2차 왕자의 난 이후 박포가 유배지에서 처형을 받는 장면이다. 드라마 뒷 이야기로는 망나니역의 배우가 막걸리를 너무 많이 내뿜는 바람에 박포역을 맡은 배우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연기했다고 한다. 영상을 보면 박포역을 맡은 배우가 웃음을 참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정종은 단지 이방원(태종)에게 휘둘린 유약한 왕이었을까?

▲ 이미지 출처 : SBS 육룡이 나르샤 

정종은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이미지와 달리 유약한 왕은 아니었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해서 그렇지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무신이며 성인이 된 후에는 이성계와 함께 전쟁터를 종군하며 왜적을 물리치는 등의 고려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고려 우왕 때는 순군만호부의 부만호가 되어 고려조정을 농단했던 이인임과 친원파 무리를 축출하는데 일조 했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어 왜구 토벌에 앞장설 정도로 이성계를 꼭 빼닮은 무장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왕위에 연연하지 않았고, 이방원이 세자 자리를 양보했을 때도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며 한사코 거부하다 양보받았던 것은 이방원의 생각을 간파하고 동생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명분을 세워주려 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다. 이유인 즉, 정종은 뛰어난 무인기질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애가 넘치고 효심이 가득하며 애처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보통 형제가 왕위를 나눠 갖다 보면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마련인데 정종은 상왕이 되어서도 태종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날들이 많았을 정도로 우애가 좋았고, 사냥을 갔다가 노루나 꿩을 잡으면 태조에게 먼저 달려가 바쳤을 정도로 효를 먼저 생각했고, 정종의 정비인 정안왕후가 죽은 뒤에는 먼저간 정비가 생각나 술자리에서 되돌아가는 정종을 차마 태종이 붙잡을 수 없었을 정도록 상당한 애처가였다고 한다.

 

※ 고려의 풍습 중 첫눈을 보내면 받는 사람은 반드시 한턱을 내야 하는 장난이 있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그 장난을 먼저 알고 심부름을 온 사람을 붙잡게 되면 오히려 눈을 보낸 사람이 한턱을 내야 하는데 세종 즉위년 10월 (1418년)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후 노상왕이 된 정종에게 첫눈을 약이라고 속여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정종은 미리 알고 심부름꾼을 잡으려 했으나 놓쳤다는 기록이 실록에까지 쓰여있다. 정무에서 물러난 태종은 이제야 한숨을 돌리듯 맘씨 좋은 형님과 장난을 치며 어울려 노는 걸 좋아했는데 자식과도 나눠 갖지 않는 권력 속에서도 정종은 형제의 우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왕위보다는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겁게 노는 것을 더 좋아했던 정종은 태종에게 선위한 후 인덕궁에 거주하며 사냥과 온천, 격구, 여행 등을 즐기면서 오히려 태종이 부러워할 정도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세종 1년(1219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정종 사후에 정종과 관련된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정종은 승하 후 262년 동안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지 못하고 명나라에서 하사한 '공정왕'이라는 시호로 불려지게 된다. 이는 조카인 세종이 정종을 정통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정종에게는 묘호를 내리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내려버림으로서 정종의 정통성을 부정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인 '용비어천가'에서나오는 육룡이 나르샤라는 문구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19대 왕인 숙종때 이르러서야 '공정왕'이라는 시호를 버리고 비로소 '정종'이라는 왕의 묘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정종의 후손들은 이때까지 제대로 된 왕실의 핏줄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정종이 묘호를 받게 된 숙종때가 되서야 왕실의 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 태종의 2인자라고 불리는 하륜은 일찍이 정종을 '기생 임금'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조선 초에는 정종을 정통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정종에게는 정비에게서 낳은 자식이 없는 대신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 15인이고, 딸이 10인이나 있었지만 정종의 자식들은 다른 왕족들과 급이 같을 수가 없었고, 종친에게 관대했던 조카 세종마저도 정종의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가차 없이 유배를 보내버리는 등 정종의 후손들은 숙종때 까지 왕족의 후손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갔다고 한다.

 

 


※ 참고 : 정종실록(총 6권)에 적힌 주요 사건 사고

1399年

정종 1년 2월 종척과 공신을 모아 도읍 옮길 것을 의논하여 송경에 환도하기로 정하다.

정종 1년 3월 노비 변정 도감을 혁파하고 업무는 형조 도감으로 이송한다. 조박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집현전을 활성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다.

정종 1년 8월 분경(奔競)을 금하는 하교를 내리다.

정종 1년 10월 조례 상정 도감을 설치하다.

 

※  태조 7년(1398) 8월에 편찬하기 시작해  정종 1년 5월(1399년)에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간행하다.

※ 분경(奔競)이란? 청탁의 목적으로 힘 있는 자의 집에 드나드는 것을 말한다.

 

1400年

정종 2년 1월 집현전을 고쳐 보문각이라 하다.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

정종 2년 2월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여 군국의 일을 맡기다.

대신으로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로 아들을 삼겠다."

정종 2년 4월 사병을 혁파하니, 병권을 잃은 자들의 불만이 노출되다. 

정종 2년 6월 권근의 건의로 다시 노비 변정 도감을 설치하다.

정종 2년 11월 임금이 왕세자에게 선위하다.

 


조선 왕실 정종 가계도

ㆍ정종의 정비 : 정안왕후 김씨(덕비)

정종의 후궁 : 성빈 지씨, 숙의 기씨, 숙의 문씨, 숙의 윤씨, 숙의 이씨, 가의궁주 유씨

 - 성빈 지씨 : 의평군(이원생), 선성군(이무생), 종의군(이귀생), 덕천군(이후생), 임성군(이호생), 도평군(이말생) + 함양옹주

 - 숙의 기씨 : 공안부 여종 출신으로 이름은 기자재이다. 자식을 여덟이나 낳았으나 두명은 죽었다. 순평군(이군생), 금평군(이의생), 정석군(이융생), 무림군(이선생) + 숙신옹주, 상원옹주

 - 숙의 윤씨 : 수도군(이덕생), 임언군(이녹생), 석보군(이복생), 장천군(이보생) + 인천옹주

 - 숙의 이씨 : 진남군(이종생)

 - 가의궁주 유씨 : 사가의 첩으로 그녀는 첩이 되기 전, 다른 이에게 시집가서 얻은 아들 불노가 있었다. 정종이 왕이 된 후 가의궁주를 후궁으로 삼고, 불노를 원자로 칭하였으나 불노의 출생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종은 불노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데 진짜 본인의 자식이 아닌 것인지, 아들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 시비 기매 : 환관과 사통하여 '지운'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정종은 지운을 본인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기매 또한 쫓아냈다. 

 - 기녀(상기) 초궁장 : 정종이 상왕일 때 가까이한 기생이었으나,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사통 하여 궁에서 쫓겨났다.

 

※ 조선 초기에는 왕실 체제가 정비되지 않아 공주와 옹주, 궁주의 사용이 혼용되었다.

 


※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글의 대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나, 약간의 야사가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 참고 사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바로가기

※ 관련 드라마 : KBS 용의 눈물, SBS 육룡이 나르샤, KBS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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