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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숙부에 의해 쫓겨난 조선 최초의 왕 단종

by 박또니 201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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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대 단종 [이홍위]

출생 사망 : 1441년 07월 23일 ~ 1457년 10월 21일(17세)
재위 기간 : 1452년 5월 18일 ~ 1455년 6월 10일(3년 2개월)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임금 단종.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

▲ 이미지 출처 : JTBC 인수대비

단종은 세자빈이 최초로 궁에서 낳은 원손이자 세종의 왕세손이며, 문종의 적장자로 왕세손부터 시작해 왕위에 오른 최고의 정통성을 자랑하는 최초의 왕이다. 왕세손으로 태어나 적장손으로 왕이 된 케이스는 오직 단종뿐. 그러나 단종이 왕으로 즉위했을 때 나이가 12살이었고, 단종을 보호해줄 왕실의 최고 어른 조차 존재하고 있지 않다 보니 맹수 같은 숙부들은 호시탐탐 단종의 왕위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던 문종은 죽기 전 삼정승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왕을 보필하게 하고, 집현전 학사인 성상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어린 단종의 안위를 여러 번 부탁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집권 1년 만에 일어난 숙부의 반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다.

황보인과 김종서가 문종의 유지를 받아들여 어린 단종을 도와 섭정을 시작한 지 1년, 황표정사와 같은 국정 운영 방식으로 신권은 나날이 강화되는데 반해 왕권은 점점 약화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결국 야심을 이기지 못하고 안평대군이 먼저 손을 쓰기 전, 단종 1년(143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를 효수하여 실권을 잡게 된다.

 

이날 김종서를 포함하여 단종의 보호자 또는 지지자 대부분이 살해되거나 유배를 당하면서 사실상 단종은 측근 세력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수양대군은 이들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반역을 도모했다며 반역 세력 척결이라는 명목 하에 먼저 안평대군 부자를 귀양 보내고 스스로 영의정 자리에 올라 자신의 세력들을 정난공신으로 세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단종을 보호하려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은 물론 단종의 유모 역할을 했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와 그의 자식들인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또한 귀양을 보내지거나 죽음을 맞게 되었다. 계유정난 2년 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양위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오래 걸리지 않아 단종 3년(1455년) 단종은 15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나 창덕궁으로 쫓겨나게 된다. 

 


단종 복위 운동. 상왕이던 단종 노산군이 되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기를 든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은 세조 2년(1456년) 6월 1일 창덕궁의 연회석에서 수양대군 부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질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가고 모두 극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죽은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일컸는다. 사육신이란 단종의 복위를 위해 힘쓰다가 처형된 여섯 명의 충신이라는 뜻이다. 이와는 다르게 목숨은 걸지 않았지만 세조 이후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의리와 절개를 지킨 신하라는 뜻의 '생육신'도 있었는데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이들은 세조를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지내다 생을 마감한 이들이다. 이처럼 지속적인 단종 복위 운동에 위협을 느낀 세조는 정통성 있는 상왕의 존재가 두려워 결국 단종을 이들과 결탁했다는 모함을 씌우고는 단종이 17살이 되던 해에는 수양대군의 측근들에 의해 탄핵 후 노산군으로 격하되어 강원도로 유배되었다가 수양대군의 끈질긴 자결 요구 또는 암살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 이미지 출처 : EBS컬쳐 (EBS 교양)

※ 단종이 죽자 세조는 그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했으나, 영월군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단종의 주검을 거두어 몰래 선산에 가매장하였다. 참고로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서 세조실록에는 자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게 했고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을 들어 단종의 죽음은 타살이라는 의견에 입이 모아지고 있다. 

 

▲ 영상 출처 : 역사저널 그날

노산군으로 기록된 단종은 훗날 중종 때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하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노산 대군으로 진봉 되었다가 241년 후인 숙종 24년(1698년)에 다시 정종과 함께 복위되어 단종으로 묘호가 정해지게 되었다. 단종의 묘호 뜻은 '예를 지키고 의를 잡는다'라는 뜻이다.

 


※ 참고 : 비운의 공주.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 영상 출처 : 역사저널 그날

 

▲ 영상 출처 : 역사저널 그날

 


※ 참고 : 단종실록(총 14권)에 적힌 주요 사건 사고

1452年

단종 즉위년 5월 황보인·김종서·정분·이사철 등을 산릉 도감 및 국장 도감의 제조로 삼다.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다. 승정원에서 세조가 지은 《역대병요》를 올리다.

단종 즉위년 6월 대행 대왕의 시호와 묘호, 능명을 정하다. 김종서가 안평 대군에게 인심 수습과 모반을 재촉하는 시를 주다.

단종 즉위년 7월 안평 대군이 아첨하는 무리와 어울리며 방자한 행동을 일삼다.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이호문이 기록한 황희의 일에 대해 의논하다. 권남이 세조에게 한명회를 추천하다. 귀인 홍씨를 숙빈으로 삼다. 세조가 신숙주를 불러 그 마음을 떠보다. 

단종 즉위년 8월 영의정 황보인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종의 시호를 올리고 종묘에 고하다.

단종 즉위년 9월 정신 옹주의 졸기. 

단종 즉위년 10월 세조가 신숙주에게 권자공의 사람됨을 묻다. 세조가 권남에게 한명회와 함께 비밀리에 황보인 등의 종적을 염탐할 것을 지시하다. 

단종 즉위년 12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 수찬에 필요한 평안도·함길도 문서를 청하다.

 

1453年

단종 1년 1월 《문종실록》을 계속 편찬하도록 하다. 《문종실록》을 수찬할 사초를 기한을 정하여 수납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 

단종 1년 2월 신숙 옹주의 졸기. 

단종 1년 5월 황보인·김종서가 《세종실록》을 감수하면서 기사를 고치게 하다. 세조가 여러 종친과 더불어 왕비를 맞아 들이기를 청하다. 혜빈이 안평 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꾀함을 아뢰다. 

단종 1년 9월 한명회·권남·홍달손 등이 세조를 뵙고 10월 초 10일에 의거하기로 약속하다. 

단종 1년 10월 세조가 이용과 결탁하여 반역하고자 했던 김종서·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효수하다. <계우정난 발생> 양녕 대군 이제 등이 안평 대군을 율에 의해 시행하고 주형받은 자는 효수하기를 청하다. 정난의 공을 논하여 세조 등을 1등으로, 권준 등을 2등으로 이흥상 등을 3등으로 하다.

단종 1년 12월 최항·신숙주 등이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청하다.

 

1454年

단종 2년 1월 세조가 효령 대군 이보·정인지 등과 더불어 창덕궁에서 처녀를 간택하다. 세조가 효령 대군 이보·영응 대군 이염 등과 모여서 송현수의 딸을 비로 할 것 등을 정하여 아뢰다. 근정문에 나아가서 효령 대군 이보 등을 보내어 송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다. 직집현전 양성지가 《황극치평도》를 편찬하여 바치다. 

단종 2년 3월 춘추관에서 《세종대왕실록》 1백 63질을 편찬하여 올리다. 

단종 2년 4월 의정부·육조 등에서 현덕 왕후의 존호를 더하기를 계청하다. 경숙 옹주가 강자순에게 시집가다. 세조가 8도 및 서울의 지도를 만들고자 하다.

단종 2년 5월 사천이 양녀에게 장가들어 난 사람은 아비를 따르게 하다. 온녕군 이정의 졸기. 문종의 후궁이 다 머리를 깎다.

단종 2년 6월 정난 공신 등에게 벼슬을 주다.

단종 2년 7월 현덕 왕후의 존호를 더하여 올리다. 수령 임기 6개년의 법을 그대로 두다.

 

1455年

단종 3년 1월 승문원 판사 송처관 등이 《이문등록》 4권 등을 올리다. 

단종 3년 3월 금성 대군 이유가 몰래 양씨와 결탁하다. 

단종 3년 5월 계양군·파평위 등이 세조를 찾아가 금성 대군 등을 제거할 계책을 말하다.

단종 3년 6월 수춘군 이현의 졸기. 경정 공주가 졸하니 부의를 내리다. 세조의 유모를 봉보 부인을 삼다. 세조가 《제범》을 올리다. 

 

※ 단종은 쫒겨난 왕이기 때문에 묘호를 받지 못하고 '노산군'으로 격하되었다가 숙종때에 이르러서야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변경되었다. 이 단종실록은 세조 사후 측근들에 의해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편찬된 것임으로 그 내용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미화하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며 희생당한 이들을 비난하는 등의 왜곡이 매우 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왕실 단종 가계도

ㆍ단종의 정비 : 정순왕후 송씨

   -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왕비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종이 불과 12살이었을 때 문종이 죽어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즉위 다음해부터 지속해서 왕비를 들일 것을 단종에게 간청했으나 단종은 한사코 거절을 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왕비 간택을 진행하여 단종 2년(1455년) 간택을 통해 왕비를 맞이하게 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유배되면서 노비로 전락해 버렸지만 그 대우는 일반 노비와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한많은 그녀는 노비로 살다 82세까지 장수했다. 이후 중종 때부터 복위가 거론되다가 송시열, 김수항의 거듭된 건의로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왕후로 추봉되었다.

 

ㆍ단종의 후궁 : 숙의 김씨, 숙의 권씨

   - 숙의 김씨 : 정순왕후와 함께 간택된 후궁으로 자식은 없다.

   - 숙의 권씨 : 정순왕후와 함께 간택된 후궁으로 자식은 없다.

 


※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글의 대부분은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나, 약간의 야사가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 사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바로가기

※ 참고 드라마 : KBS 공주의 남자, JTBC 인수대비, KBS 한명회, SBS 왕과 나, KBS 왕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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