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 헤르만 헤세
# 분야 : 소설
# 출간 : 더스토리 / 2019년(원작 1919년)
# 평점 : 9.6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놀거리가 엄청 많았다. 밖에 나가면 항상 놀이터에 친구들이 있었고,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만화영화를 보느라 심심할 틈이 없었다. 그때는 이렇게 놀거리가 많은데 왜 재미도 없는 책을 읽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러다 고등학교 수행평가 때문에 억지로 책 하나를 읽어야 했는데 떠밀려서 읽게된 책이라 처음에는 심드렁 했지만 점점 책에 빠지게 되었고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내생에 처음으로 완독이란 걸 하게되어서 그랬는지 그 당시 느꼈던 뿌듯한 감정과 책에 대한 여운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그 책은 헤르만 헤세 작가의 <수레바퀴 아래서>였다.
성인이 되어 그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매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을 가까이 하게 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하게 <데미안>이라는 책을 선물 받게 되었는데 표지에서 '헤르만 헤세' 작가의 이름을 보게된 순간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했던 벅찬 감정이 한꺼번에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데미안>은 <수레바퀴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헤르만 헤세의 고전문학이다. 고전문학은 현재 다양하게 쏟아지고 있는 책에 비해 그 내용의 무게가 다소 무거우며 어려운감이 있다. 상당히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이며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많은 비유와 은유가 그 속에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문학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대표적인 문학이 아닐까 생각된다.
<데미안>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 집필되어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간되었다. 독일인인 헤르만 헤세는 당시 전쟁과 국수주의를 반대하며 독일에 비판적인 글들을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출판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후에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다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또다른 자아인 '에밀 싱클레어'를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날카롭게 건드리면서도자신의 자전적 소설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소설이 <데미안>인 것이다.
2019년은 <데미안>이 출간된 지 100년이 된 해인데 더스토리 출판사에서는 데미안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의 데미안을 새로 발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선물받은 책은 다른 출판사의 것이었는데 빈티지함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예쁜 표지의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소장용으로 다시 이 초판본 디자인의 데미안을 구매하게 되었다.
사실, 선물 받은 책으로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내용이 너무 심오하고 번역이 딱딱하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내용은 알겠으나, 문장에 내포된 뜻이 눈에 잘 읽히지가 않았다. 그러나 더 스토리의 데미안을 읽어보니 확실히 번역 차이 때문인건지 몰라도 같은 내용이라도 번역가에 따라 책에 대한 이해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언어라는게 '단어' 하나에 따라서도 늬앙스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이 번역하려는 나라의 문화를 잘 모는다면 작가의 의도는 번역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본의 책을 살때에는 번역가가 누군지에 따라서도 읽는이의 이해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크게 알게되었다. 아래 데미안 번역에 대해 누군가 정리해둔 글을 참조해 두었으니 출판사별 번역체를 한번 비교해본 뒤 책을 구매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데미안 출판사별 번역체 비교글 : https://www.instiz.net/name/16587739
소설 <데미안>은 20대의 '에밀 싱클레어'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10대부터 자신의 성장과정을 써내려간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장 과정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는 동안 겪게 되는 내면의 아픔과 흔들림을 신비롭고 몽환적이며 상징적인 비유와 은유를 통해 그려나갔다. 소설 속 '에밀 싱클레어'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하녀를 두고 있을 정도로 유복하게 자란 인물이다. 따뜻하고 양심이 존재하는 '선의 세계'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 속에서만 살아왔으나, 인간의 호기심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어린 싱클레어는 '선'의 이면인 '악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했다. 그러나 여전히 '선의 세계'에서 나가기를 두려워했는데 그러던 중 동네 깡패와 다를 것 없는 소년 '프란츠 크로머'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금지된 세계인 '악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고 '선의 세계'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과 '악의 세계'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중 '막스 데미안'이라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를 혼내 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하려는 또 하나의 '유혹자'임을 깨닫고 그에게 멀어지려 한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내부에서 서서히 파괴되고 있는 익숙한 세계의 파편을 느끼게 되면서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자신의 두 눈을 가렸던 '껍질'을 깨고 나와 선과 악이 통합된 인간으로 각성하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나는 그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살아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데미안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中에서 -
<데미안>은 소설이지만 인문학적 성격을 띄고 있어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책 제목은 싱클레어가 만난 막스 데미안이라는 소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어린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또 다른 유혹자라고 생각해서 그를 거부했으면서도 왜 한편으로는 그를 동경하고 그리워하게 된 것일까?
그 시작은 '카인과 아벨'이라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소년 데미안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린 싱클레어에게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단순히 선과 악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고법을 일깨워 주었고 주체적인 사고를 키워 사회로부터 주입된 가치관이 아닌 자신만의 자아를 찾도록 일깨워주었다. 잠깐 '카인과 아벨'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이드른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이브가 낳은 두명의 자식인데 농부였던 형 카인은 하느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목동 아벨에게 질투를 느껴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 인류 최초의 사람이 낳은 자식들이 최초의 살인자와 살인을 당한자가 된 것이다. 이에 하느님은 카인에게 벌을 주어 영원한 방랑생활을 하게 했으나, 아벨의 후손들이 카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도록 '카인의 표식' 주어 카인과 그의 후손들을 보호해줬다는 내용이다.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성경 속 이야기이다. 그러나 소년 데미안은 이 내용에 의심을 품게 되었고 또다른 관점에 대한 해석을 어린 싱클레어에게 들려주게 되었는데 그의 의견은 어린 싱클레어와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주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한테 유리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거든. 그래서 카인의 자손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정반대로 설명한 거야. '표식을 지닌 자'들이 우월해서가 아닌 불길해서라고 말이야. 용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니까. 핵심은 강자가 약자를 죽였다는 거야. 그때부터 약자들은 강자를 두려워하며 탄식했지. 하지만 누군가 "왜 너희가 그를 해치우지 못하는거야?"라고 물으면 자신들이 겁쟁이라서가 아닌 "그는 하느님이 보호하는 표식을 지녔어"라고 대답하며 이 이야기는 이렇게 엉터리처럼 생겨나게 된 거야."
그의 의견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하게 했다. 지금까지 나는 언론에 나오는 기사들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습득하고 있지는 않았나? 나는 내 스스로 무언가의 가치를 의심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누군가가 흘린 소문만 믿고 다른 사람을 편협하게 판단하지 않았나?라는 생각들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와 혼란스러워졌다. 아벨이 피해자라고 해서 그가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카인이 살인자라고 해서 약자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든 진실과 진리는 사실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비판 의식을 깨닫게 해주었다.
어린 싱클레어는 이렇게 자신에게 혼란만을 남겨주는 소년 데미안을 지속해서 밀어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가 그리워져 문득, 꿈에서 본 새 그림 한 장을 그에게 보내자 데미안은 아래의 구절이 담긴 쪽지를 답으로 보내주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中에서 -
여기에 나오는 아브락사스는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를 모두 포괄하며 두 세계의 접점에 있는 존재라고 한다. 그는 이 구절을 통해 한 개인이 독립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쪽에만 의존하고 있던 것들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라는 답을 보내 준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데미안이란 소년은 정말 싱클레어가 만난 사람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인도해 준 인물이다. 그는 굳건하며 세상을 다르게 볼 줄 알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게 일반적인 학생들의 모습과는 모든 면에서 다른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와 친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누구의 마음에도 들려고 하지 않았던 소년이었다.
나는 어쩌면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꿈꾸던 내면의 '이상(理想)'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머릿속에서 많은 고뇌와 갈등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느것을 선택해야 후회를 하지 않을지, 어느 것을 선택해야 그들에게 배척당하지 않을지. 그러나 이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데미안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너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라." 선악이란 이분법으로 분열된 세계가 아니라 전체로의 세계를 지향하는 길. 세상에는 흑과 백이 아닌 회색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 아님을 알려주는 매개체가 데미안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봤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스펙을 쌓느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유복하고 다른 걱정 없이 살았던 싱클레어처럼 철학적으로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일까? 다른 걱정 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 했던 학창시절보다 30대가 된 지금이 더 헤르만 헤세 작가의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 것은.
나는 내 안의 데미안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도 나는 사람들의 이목이라는 틀 안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을 몇 번 더 읽어본다 한들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데미안을 만나 알을 깨고 세상에 나가기 전까지 나는 여전히 어두운 세상안에 쳐박혀 있는 어린 에밀 싱클레어로 남아있을 것 같다.
끝으로 이 책은 말한다. 겁에 질려 평생 자신을 세상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살 것인지, 당당히 다른 세계와 마주하겠는지 선택은 결국 우리의 몫이라고. 그 선택에 이 책 <데미안>이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으니 아직 알에서 깨어나오지 못한 수많은 에밀 싱클레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 이 책은 직접 구매하여 읽은 책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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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소설 데미안은 방탄소년단(BTS)의 뮤직비디오 피 땀 눈물(Blood Sweat & Tears)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라고 한다. 피 땀 눈물 뮤직비디오와 소설을 비교해서 해석해놓은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첨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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